고려인 노동영웅은 구소련에서 1938년부터 1991년까지 사회주의 노동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은 고려인이다. 1938년 소련 최고회의에서는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제정하였다. 국력을 신장시킨 경우, 경제나 과학, 문화 발전에 기여한 경우, 개인의 생산성이 월등히 향상한 경우 등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을 때 훈장을 주었다. 고려인은 농업이나 축산 분야에서 공적을 인정받은 경우가 많았다. 209명의 고려인이 칭호를 받았는데, 이중 북극성 콜호즈의 회장이었던 김병화는 2번을 받았다.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린 고려인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명예와 영광을 얻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에서 특정 산업 분야의 우수 노동자에게 준 최고의 호칭으로, 개인에게는 명예와 영광을, 소속 단체에게는 우수성을 상징하였다.
1938년 12월 27일에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에서‘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가 제정되었다. 처음에는 칭호만 주다가 1940년부터는 낫과 망치가 새겨진 훈장도 함께 주었다. 이 칭호는 국력을 신장시킨 경우, 경제나 과학, 문화 분야의 발전에 기여한 경우, 개인의 생산성 향상이 기준을 초과한 경우 등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을 때 주었다. 총 수여자는 20,605명에 이르며, 칭호를 2~3번 받은 사람도 있는데, 2번을 받은 사람은 AK소총을 개발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등 205명이고, 3번을 받은 사람은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 16명이다. 고려인은 모두 209명이 칭호를 받았는데, 북극성(北極星) 콜호즈(kolkhoz)의 회장을 맡았던 김병화(1905~1974)는 2번을 받았다. 이 칭호는 1991년 12월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없어졌다.
1948년~1951년에 많은 고려인들이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950년대~1960년대에 들어서는 몇몇 고려인만이 칭호를 받았을 뿐, 그 숫자는 점차 줄어 들었다.
고려인 사회주의 노동영웅은 벼, 면화, 사탕무우 등 농업 분야와 축산 분야에서 공적을 인정받았던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인을 농업전문가로 연결짓는 이미지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곧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에 거주하였던 고려인들이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기에, 자연히 농업 분야에서 노동영웅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카자흐공화국의 탈디쿠르간주(Taldy-Kurgan州) 카라탈(Karatal) 구역에서는 총 31명의 노동영웅 가운데 고려인이 29명이나 되었다. 또한 단일 경제공동체로서는 김병화가 이끈 북극성 콜호즈에서 모두 26명의 고려인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이 숫자는 소련 전체에서도 높은 숫자에 해당한다.
칭호를 2번 이상 받았을 경우에는 고향 땅에 청동으로 만든 흉상을 세울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 현재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Tashkent州)에 있는 이전의 북극성 콜호즈의 입구에는 김병화의 흉상이 서 있다. 흉상은 정장 윗옷의 왼쪽 가슴에 붉은색 기장(旗章)에 금색 낫과 망치가 있는 훈장을 달고 있는 모습이다. 비록 흉상은 서 있지 않지만, 카자흐공화국 크질오르다주(Kzyl-Orda州)의 선봉(先鋒) 콜호즈를 이끈 김만삼(1882~1964)도 1947년에 벼농사를 시작한 뒤 성공적인 생산 업적을 내놓아 1949년 5월 20일에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렸다. 고려인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특별히 ‘사회주의 노력영웅’이라고도 표현하였다.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린 고려인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면서 사회적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이 해체된 뒤에 칭호는 무의미해졌지만, 2013년 3월에 러시아연방대통령 푸틴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각 방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룬 사람을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단어가 빠진 ‘노동영웅’으로 승인하면서, 다시 사회주의 노동영웅에 대한 명예를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