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에 한인들은 멕시코의 유카탄(Yucatán)으로 이민을 와서 에네켄(henequén) 농장에서 일하였다. 그 뒤 1909년에 대부분 농장을 나왔지만, 당시 멕시코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유카탄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고 하였다. 더욱이 1910년부터 내란이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일어났으므로 한인들은 더 이상 멕시코에 사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다른 지역으로 함께 이주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였기에 자본을 모으려고 회사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1910년 6월 경에 멕시코 한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회사가 설립되었는데, 감독은 정춘식, 서기는 김기창, 재무는 신광희 등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간부들이 맡았다.
1910년 말에 멕시코 혁명이 본격화하면서 유카탄 지역에서는 일자리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경제적 어려움에 지친 한인들은 점차 유카탄 지역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리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는 멕시코 한인들을 하와이로 집단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곧 1911년 1월 7일에열린 대의원회에서 ‘멕시코 재류동포 구제안’을 통과시킨 뒤, 멕시코에 견묵위원(遣墨委員)으로 파견하였던 황사용(黃思溶)을 미국의 여러 곳에 보내어 멕시코 한인의 실상을 알리도록 하였다. 당시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는 멕시코 한인을 구제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는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주협회와 함께 멕시코 한인 이민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여 허락을 받고는 미국 연방정부에 멕시코 한인의 입국 허가를 신청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멕시코 한인들을 한번에 1백명씩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으로 이주하기 위해서 후원 고본금(股本金) 1만5600원을 발행하였다. 한편 멕시코의 메리다지방회(Mérida地方會)는 이근영(李根永)을 총대로 선임하여 김동현, 김명수, 이병언 등과 함께 하와이로 보내고자 하였다. 1911년 9월에 이들은 멕시코의 아카풀코(Acapulco)항을 떠나 만사니요(Manzanillo)항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9월 19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미국 이민조례에 위반이 되어 하와이로 가지 못하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다. 또한 미주 한인들은 멕시코 한인의 하와이 이주를 위해서 공채를 발행하여 1912년 1월에 7천 여원의 공채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한인의 하와이 이주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면서 이러한 자금은 되돌려 주었다.
멕시코 한인은 미주에서 살다가 멕시코로 이주하였다. 이주 이후에 그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친연성을 가진 미주 한인이 나서 어려움을 구제하려고 하였다. 이 운동은 해외 한인의 공동체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