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17세기 백자철화용문호로, 2012년 5월 17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8.4㎝로 몸체의 윤곽선이 풍만하면서도 원형에 가까운 이른바 '달 항아리'의 모습이다.
철화백자는 백자의 태토(胎土)에 석간주(石間朱)라 불리는 산화철 안료를 이용하여 시문한 후, 환원염으로 소성한 백자를 말한다. 철화백자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는 17세기는 철화백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이 시기의 철화백자를 살펴보면, 다양한 양식과 문양들이 다채롭게 시문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종속문으로 주로 쓰인 당초문(唐草文)을 비롯해서 운룡문(雲龍文), 각종 꽃과 호랑이, 사슴 등 동물을 그린 화훼 · 영모문(翎毛文), 매죽문과 같은 사군자류의 문양이다.이 시기 철화백자는 관요를 비롯 지방 가마에서도 상당수 출토가 되었다. 이처럼 관요는 물론 지방 가마까지 폭 넓게 철화백자가 생산된 배경에는 원료 자체를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다루기도 쉬운 이유일 것이다.
철화백자가 크게 유행하게 되는 배경에는 청화안료의 수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청화는 조선 전기부터 꾸준히 사용되었지만, 안료인 회회청(回回靑) 자체가 전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수입가와 청화의 정제(精製) 상태에 따라 사용량과 색상이 좌우되었다. 이런 와중에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란을 겪으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그 휴유증을 겪으면서 엄청난 인적 · 물적 손실을 감수하여야만 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전대에 유행하였던 청화백자는 중국으로부터의 회회청 확보가 어려워지자, 청화 제작이 사실상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석간주를 이용한 백자들이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청화 연료의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청화백자 제작이 중단되고 자연스럽게 철화백자 및 산화동을 사용하는 동화 백자 등이 제작되면서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유일하게 철화백자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항아리는 몸통 가운데를 기준으로 위쪽과 아래쪽의 형태가 대칭을 이룬 둥근 원호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달항아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높이가 40㎝ 내외에 이르는 대형 항아리는 몸통의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접합하였는데, 이 항아리 역시 커다란 발(鉢) 두 개를 구연끼리 맞붙이는 방식으로 제작하여 동체 중앙부에 깎아 다듬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문양은 동체 상부에 항아리를 휘감은 용과 풀처럼 보이는 구름을 종속 문양이 없이 표현하였다. 과감한 생략과 변형으로 해체된 마치 지네와 같은 용의 얼굴과 더듬이처럼 표현된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을 표현한 빠른 필치는 자연스럽게 일그러진 항아리의 형태와 함께 정치한 청화백자와는 다른 파격미를 느끼게 한다. 비늘을 윤곽선으로 나눈 후, 한 가운데를 점으로 찍는 방식으로 간단하게 표현하였다. 마치 전기에 감전되어 얼굴이 해체된 듯한 이러한 용의 모습은 주로 관요 이외의 지방 가마에서 보인다. 비교적 정선된 태토에 유약은 전반적으로 회백색의 색조를 띠며, 철화의 발색은 진하고 담박한 필치로 나타난다.
구연부에서 바닥 부분까지 균열된 두 곳을 접합 수리한 것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17세기 산화철 안료로 용문이 장식된 달항아리로, 둥글고 넉넉한 기형에 활달한 필치로 표현된 익살스러운 용의 모습이며 조선 후기 철화 장식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광주 관요보다는 지방의 민요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