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 중인 백자청화산수인물문사각병은 200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높이 12.8㎝, 입지름 2.2㎝, 밑지름 7.8㎝이며, 동체 사면에 옅은 색의 청화안료로 산수문을 시문하였다.
조선 후기 백자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특징으로, 산수문과 각형 자기의 등장을 이야기할 수 있다.
명말 청초 중국 그릇에서 많이 보이던 각형 기형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각형 그릇의 제작에는 소위 모깍이 기법을 사용하여 성형된 원형의 그릇 표면에 각을 내거나 판형 기법으로 제작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이러한 각형 기형은 항아리, 병 등의 일상 기물뿐만 아니라 필통, 연적 등의 문방구에서 확인된다. 또한 덩어리로 사각을 제작한 후 속을 파내는 방식도 사용되었다.
조선의 백자에서 처음으로 산수문이 나타나는 시기는 18세기 이후로, 사옹원 분원의 장인들에게 가마 중 한 칸 분량의 그릇을 팔아 생계비에 보태 쓰도록 한 사번(私燔)이 허용되고 난 이후로 보인다. 이후 왕실 취향의 용이나 송죽매(松竹梅) 뿐만 아니라 문인과 일반 사대부들이 즐겨 하던 산수문이나 길상문이 백자의 문양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시서화에 능했던 임금들이 연이어 관심을 가진 것도 큰 배경이 되었다. 특히 영조는 왕세자 시절 도제조를 겸임했는데, 이때 산수와 화훼 등 도자기의 밑그림을 직접 그려 분원에 가서 구워 오라고 명하기도 했다. 또한 18세기에는 사대부 문인 계층이 도자 수요층으로 부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문인풍 양식의 자기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중국으로부터 화보의 전래와 진경산수와 남종문인화의 유행 등 회화에서의 변화 및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연경사행(燕京使行)으로 인해 중국 자기의 유입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자청화산수인물문사각병은 사각기둥 모양의 동체 어깨에 모가 깍이고 가운데가 좁아든 목과 구연은 밖으로 말린 형태이다.
어깨 부분의 가장가리를 한 줄로 구획하고 그 안에 간략화된 당초문(唐草文)을 배치하였으며, 동체 4면 역시 각각 테두리선으로 면을 구획한 후 그 안에 근경, 중경, 원경의 산수 인물문을 간결한 필체로 그려 넣었다. 동체부에 그려진 산수문 한 장면은 소상팔경 중 ‘산시청람(山市晴嵐)’으로 생각된다. 산시청람의 주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는 이야기하는 두 사람을 길게 뻗어 나온 근경의 바위에 배치한 것이다. 동체 전면에 담청색 계통의 백자유약을 입혔으며, 청화의 발색은 옅은 청색이어서 1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굽바닥은 편평하며 유약을 닦아내고 가는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백자청화산수인물사각병은 조선 후기 새롭게 등장하는 산수문과 사각 기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백자청화산수인물사각병의 인물 표현과 배경 처리는 매우 간략하게 표현되었지만 소상 팔경의 한 장면임을 명확히 알 수 있으며 사각의 형태는 비틈림이나 터짐이 없이 잘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