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자청화산수문호는 201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5.8㎝이며 동체 앞 · 뒷면에 각각 산수문을 그려 넣고 그 사이에 대나무와 매화를 장식하였다.
조선백자에서 처음으로 산수문이 나타나는 시기는 18세기 이후로 사옹원 분원의 장인들에게 가마 중 한 칸 분량의 그릇을 팔아 생계비에 보태 쓰도록 한 사번(私燔)이 허용되고 난 이후로 보인다. 이후 왕실 취향의 용이나 송죽매(松竹梅)뿐 아니라 문인과 일반 사대부들이 즐겨하던 산수문이나 길상문이 백자의 문양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임금들이 연이어 관심을 가진 것도 큰 배경이 되었다.
특히 영조는 왕세자 시절 도제조를 겸임했는데 이때 산수와 화훼 등 도자기의 밑그림을 직접 그려 분원에 가서 구워 오라고 명하기도 했다. 또한 18세기에는 사대부 문인 계층이 도자 수요층으로 부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문인풍 양식의 자기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또한 중국으로부터 화보의 전래와 진경산수와 남종문인화의 유행 등 회화에서의변화 및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연경사행(燕京使行)으로 인해 중국 자기의 유입이 한 몫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항아리는 구연부가 높게 직립하였으며 크기가 크고 동체부의 최대 동경 주변에 상하동체를 붙인 흔적이 있다. 어깨부터 부풀어지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시 그 둘레가 줄어들어 구연부와 대조되는 곡선미가 돋보인다.
견부와 하부에 여의두문대(如意頭紋帶)를 두르고 그 사이 몸체의 앞면과 뒷면에는 산수문을, 산수문 사이에는 각각 대나무와 매화를 그려 넣었다. 산수문은 2중의 커다란 능화문(菱花紋) 창 안에 그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형태는 18세기와 19세기의 청화백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첫 번째 산수문은 근경에 소나무 숲과 누각을 배치하고, 중경은 화면 왼쪽으로 치우친 절벽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정면 상단 중앙에 배치된 원경은 중첩된 산봉우리 모습을 담고 있다. 화면 가운데는 약간의 물결을 제외한 대부분을 비워 강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여백의 미로서 동양화의 공간감을 잘 살리고 있다. 또한 두보 시구에 나타난 쓸쓸하고 깊은 5월의 강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원경 오른쪽에 배치된 한시 구절인 ‘오월 강심초각한(五月江深草閣寒)’으로, 이는 두보(杜甫) 한시(漢詩)의 한 구절로서 중국 명대 화제와 조선시대 화원의 화제로도 애호되었던 구절이다.
반대편 산수문은 수평 구도를 하고 있으며 물 위에 떠 있는 호젓한 4척의 배, 먼 산과 그 뒤에 두둥실 떠 있는 달을 그려 넣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능화문창의 밖 좌우에는 각각 매화와 대나무를 배치하였다. 청화의 발색이 진한 회청색을 띠며 유면 전체에 빙렬이 있다. 굽은 모래자국이 남아 있어 모래받침으로 소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수문 호는 산수문과 한시의 구도와 배치가 독특하고 크기와 형태의 당당함, 정선된 태토(胎土) 등 제작 기법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산수문과 매화, 대나무 그림의 필치도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두보의 한시가 남아 있는 드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