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직수 ()

현대사
인물
해방 이후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을 역임한 관료. 법조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7년
사망 연도
2001년
출생지
충청남도 서천
관련 사건
사카린밀수사건|민청학련사건|인혁당사건|코리아게이트
정의
해방 이후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을 역임한 관료. 법조인.
생애 및 활동사항

충청남도 서천 출생으로 1947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대학(지금의 서경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1952년 졸업하였다. 1951년 3월부터 1960년 6월까지 군법무관으로 복무하고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전역한 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원용덕 중장이 김성주 살해사건으로 재판받을 당시 변호인을 맡았다.

5·16군사정변 이후인 7월 31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에 임명되었다. 군정하에서 서울지검 검사에 임명되었으며, 헌법심의특별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63년 7월 중앙정보부 차장에 임명되었고, 같은해 12월 6일 검찰 총장에 임명되었다.

1966년 삼성의 사카린밀수사건으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1971년 6월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1973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연루되어 경질되자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취임 이후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정보부 제6국을 강화하고 공안사건을 조작하였다. 문인간첩단과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은 대표적인 사건이다.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조총련계 모국방문사업을 추진했다. 동아일보의 광고주들을 협박해 광고를 해약시키는 등의 언론탄압을 기획하였다.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하고, 중앙정보부 요원인 김상근이 미국에 망명하자 12월 4일 경질되었다.

중앙정보부장 퇴직후 1977년 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1979년 1월에는 대통령 법률담당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2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면직되었다. 1981년부터 일양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활동했다. 2001년 9월 9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상훈과 추모

1953년 화랑무공훈장, 1976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폴리티쿠스, 2012)
『한국민주화운동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집필자
윤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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