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통항조합 ()

산업
단체
1929년 4월 오사카(大阪)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조직 · 운영한 선박협동조합.
정의
1929년 4월 오사카(大阪)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조직 · 운영한 선박협동조합.
개설

1928년부터 결성을 준비하고 1929년 4월에 탄생한 선박협동조합으로서 자주운항운동을 표방하며 1930년 11월부터 1933년말까지 제주도와 오사카사이를 운항하였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권익향상 및 식민지해방을 위하여 지역단체와 연대활동을 하는 가운데 거듭되는 좌초사고와 경영난, 일본당국의 탄압 등으로 1934년 2월 운영이 정지되었다.

설립목적

제주도~오사카간 선박회사를 독점적으로 운영하던 조선우선(朝鮮郵船)회사와 아마가사키(尼崎)회사의 횡포에 분개한 오사카 거주 제주도민들이 운임인하와 대우개선을 목적으로 ‘자주운항운동’을 내걸고 설립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28년 4월, 제주도민대회에서 조선우선회사와 아마가사키회사에 대해 운임인하와 대우개선을 요구하였으나 회사측이 거절하자 김달준(金達俊)과 문창래(文昌來)가 중심이 된 자주운항운동이 일어났다. 1929년 4월, 김문준(金文準)은 제주도민 유지간담회를 통해 제주통항조합준비회 조직을 결정하고, 1930년 3월 25일에 기관지 『제주통항조합뉴스』(한글판)를 발간하였으며, 4월 21일에 오사카 나카노시마(中之島) 공회당에서 동아통항조합 설립대회를 개최하였다. 본부는 오사카 나니와구(浪速區)에, 경영부는 미나토구(港區)에 두었다(조합장 문창래). 조합 가입은 개인이 아닌 지구(地區)가입방식을 채택했는데, 창립 당시에 13개 지부가 조직되었고, 조선인 120지구가 참가하였다.

1930년 9월 8일에 열린 임시대회에서 임시집행부(의장 문창래, 부의장 현석헌, 현길홍)를 구성하고 일본선박회사 운임(12원 50전)보다 저렴한 운임(6원 50전)으로 11월 1일부터 취항하기로 결정한 후, 교룡환(蛟龍丸 3,700톤급)을 계약하였다. 출항 당시 출자금이 6만원에 불과해 자금 부족 상태로 시작하였고, 운영 결과 12,000원의 결손이 생겼다. 여기에 경쟁관계에 있던 일본 회사측이 운임을 3원까지 인하하여 제주통합조합이 일시적으로 조업 중단 위기에 처하자, 일본회사들은 다시 운임을 6원 50전으로 인상하였다.

이에 동아통항조합은 ‘부르조아 배를 타지 말자’는 슬로건 아래 무선전신설비까지 갖춘 복목환(伏木丸, 13,300톤급, 구입대금 22,000원)을 구입하기로 결정하고, 일본당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선박구입자금 4,350원을 마련한 후 배를 담보로 선박을 구입하였으나, 1931년 12월 1일에 취항 직후 12월 6일과 1932년 4월에 배가 좌초하는 사고가 연이어 일어났다.

오사카 거주 조선인들은 수선기금을 모금하는 등 운항재개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심각한 경영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1932년 5월에 개최된 3회 대회에서 부인부(婦人部) 조직과 「뉴스」를 통한 선전활동을 결정하고 1932년 7월에 돌격대를 조직하는 등 승선율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결과 수개월간 조합원이 2만여 명으로 증가하고 승선율도 높아졌다. 하지만 거액의 부채로 인해 경영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일본당국으로부터 일본공산당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働組合全國協議會)의 산하단체로 지목되면서 1932년 11월 대탄압기간 동안에 조합원들이 대거 검거되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33년 2월 15일 임시대회에서 조합운영을 지속하기로 결정하고 동아상회준비회(東亞商會準備會)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인 활로모색에 나섰지만, 조합원이 반감하여 7만 3천 원에 달하는 거액의 부채로 인해 12월에 운항이 정지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 1934년 1월 29일 임시대회에서 ‘복목환을 매각하여 부채를 정리하고 동아실비배급소(東亞實費配給所)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2월 6일에 긴급유지회를 개최하여 조합 존속을 가결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합존속을 위한 기금을 9,000여원이나 모금하였으나 이후의 활동은 찾을 수 없다.

기능과 역할

일본 사회에 조선인의 역량과 단결력을 보여준 민족운동단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결성 당시부터 대표적인 오사카의 조선인운동가 김문준의 지도 아래 김달준, 문창래, 현석헌(玄錫憲), 현길홍(玄吉弘), 김동인(金東仁), 성자선(成子善) 등이 주도하였고, 임시대회나 정기대회에서 민족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을 표방했으며, 일본공산당계열의 사회운동단체와 연대 활동을 하였다.

1930년 9월 8일에 열린 임시대회에서 ‘운동방침에 관한 건’을 비롯한 9개항의 결의사항을 결정하였다. 1932년 5월에 개최된 제3회 동아통항조합대회가 채택한 행동강령도 ‘도항자유획득’을 포함해 ‘피압박대중의 경제적·정치적 투쟁 참가, 무산계급운동의 전선통일을 위한 활동 참가, 민족차별 철폐’로 이루어져 있었다. 선박에서 일본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가 압수되면서, 일본 당국의 탄압을 불러와 합법적 차원의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기 어려웠다.

의의와 평가

동아통항조합은 『민중시보』, 오사카조선무산자진료소와 함께 1920년대 후반 재일조선인의 자체역량이 확충된 대표적인 사례다. 첫 출항 당시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항구에 모여 축하하였고, 조합 설립 이후 선박구매나 연이은 좌초사고가 있었으나, 선박수선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천 원의 기금 모금에 조선인의 호응이 끊이지 않았다. 비록 더 이상 운영하지 못하고 1934년에 해산하였으나, 일본의 독점 선박회사에 맞서 조선인 스스로 선박협동조합을 운영한 자부심은 일본 패전 이후 형성된 재일동포사회의 귀중한 자산으로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1930년대 초기 오사카(大阪)지역 협동조합과 조선인운동」(정혜경, 한일민족문제학회, 『한일민족문제연구』1, 2001)
『特高月報』(1933.2, 1933.3, 1933.5)
『大阪社會勞動運動史』2(大阪社會運動史編纂委員會, 1986)
『在日朝鮮人-私の靑春』(朴慶植, 三一書房, 1981)
「東亞通航組合 第3回 定期大會議事草案」(東亞通航組合, 『在日朝鮮人史硏究』7, 在日朝鮮人運動史硏究會, 1980)
「內務省 警保局 社會運動の狀況(1931)」(朴慶植,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 三一書房, 1975)
집필자
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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