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경제의 중간착취를 배제하고 미래사회의 이상을 목표로 하는 유력한 분배기관의 구축을 목적으로 결성된 일본소비조합의 전국 조직체이다. 1858년 철공노동조합인 일본철도교정회가 노동운동의 한 부분으로 공동점(共働店)이라는 소비조합을 조직한 데에서 비롯되었고, 1879년에 소수의 구매생활협동조합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0년에는 산업조합법이 공포되면서 발전하였고, 1차 대전 이후 노동운동의 발전기에는 직장과 학교의 다양한 소비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자본주의 경제의 중간착취를 배제하고 미래사회의 이상을 목표로 하는 유력한 분배기관의 구축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1920년대에는 관동(關東)소비조합연맹이, 1930년대에는 일본무산자소비조합연맹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동(關東)소비조합연맹은 1922년에 결성된 소비조합 연합체인 소비조합연맹을 토대로 1926년 탄생하였다. 소비조합연맹은 1924년말에 가맹연합이 21개, 조합원수는 5천여명에 달하였다. 관동(關東)소비조합연맹은 내부적인 견해 대립으로 1929년에 분열되어 우파는 1930년에 소비조합회로 독립하였다.
관동소비조합연맹의 뒤를 이은 일본무산자소비조합연맹은 1932년 3월에 전국조직으로 탄생하여 1938년 해산될 때까지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 거주 조선인 사이에서도 지역 차원의 소비조합 결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일본무산자소비조합연맹 발족 당시에 이미 김태욱(金台郁)·김경중(金慶中)·윤혁제(尹赫濟) 등 오사카 지역 운동가들이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동대판(東大阪)소비조합 등 일부 조선인소비조합이 가입하기도 하였다. 김태욱은 중앙위원과 교육출판위원으로 활동했고, 기관지의 조선어판을 발행하는 등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펼쳤다.
1932년 6월에 관서(關西)지방협의회를 결성하고 이 지역의 조선인을 조직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지협(地協)뉴쓰(조선어판)』을 비롯한 각종 인쇄물과 격문을 산포했다. 1932년 6월 7일에 조직된 일본무산자소비조합연맹 관서지방협의회는 6월 15일자로 『관서(關西)지방협 뉴스(조선어판)』를 발간하고 7월 2일의 제6회 국제소비조합데이에 대한 「투쟁방침 지령서(한글)」를 발행하여 조직의 확대강화를 도모하였다.
1933년 5월에 관서지방협의회는 관서(關西)지방위원회로 개칭되었고, 대동소비조합과 근애소비조합의 조직화에 역할을 담당한 김치중(金致仲)이 일본무산자소비조합연맹의 서기로 활동하였다.
일본무산자소비조합연맹은 합법성과 대중성을 유지하면서 좌파계 노동운동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 노동계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으므로 조선인 운동가들과 지역 단위의 조선인 소비조합들도 참여하였으며, 연맹도 조선어판 기관지를 발간하는 등 조선인을 대상으로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탄압이 심해지면서 활동이 쇠퇴하다가, 일본의 전시 체제가 시작되면서 1938년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