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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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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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국내외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통일조선연감 발행, 조선민족통일회의 창설, 통일일보 발간 등의 행보를 보이며 통일정책에 힘쓴 언론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창정(蒼丁)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9년
사망 연도
1990년 5월 14일
출생지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
관련 사건
대남간첩단 사건|진보당 사건|조총련동포 추석성묘단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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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국내외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통일조선연감 발행, 조선민족통일회의 창설, 통일일보 발간 등의 행보를 보이며 통일정책에 힘쓴 언론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내용

1919년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多樂里) 출생으로, 호는 창정(蒼丁)이다. 1933년 청주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경복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졸업했다.

졸업 후 종로2가에 광산기계를 취급하는 이보합명회사(以保合名會社)를 설립했다. 사업에 종사하면서 사옥 2층을 좌익계 독립운동가 정백(鄭栢)이 경영하는 조선광업사에 거의 무상으로 빌려주는 등 회사를 전국 독립운동가와 연락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운형(呂運亨), 송진우(宋鎭禹)를 비롯한 좌우익의 지도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1943년 여름 회사를 해산한 후에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하여 만주를 중심으로 국내외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3년 12월 단파 라디오로 「카이로 선언」을 듣고 여운형에게 연락해 1944년 건국동맹(建國同盟) 결성에 참여했다. 1945년 5월에는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해 서울 도심의 장안빌딩 일부를 아지트로 삼고, 일제 패전에 대비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날부터 17일 발족한 건국준비위원회의 하부기관인 보안대를 창설하는 데 참여했고, 서울시내 주요 지구에 지대(支隊)를 조직했다. 좌우대립이 표면화되자 건국준비위원회 청년층과 함께 1945년 10월 5일 여운형, 허헌(許憲), 박헌영(朴憲永)계 2명, 송진우, 김병로(金炳魯), 백관수(白寬洙), 안재홍(安在鴻) 등 국내 좌우 지도자 회담을 개최하고 사회를 맡아 행동통일 합의를 이끌어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정소식이 전해지자 신탁통치에 반대했으며, 1946년 결성된 사회민주당의 선전국장이 되었으나 사회민주당이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자 탈당하고, 유엔 감시하의 선거가 북한에서 불가능하다면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치러 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입장을 지지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된 조봉암(曺奉岩)의 부탁으로 농림부 비서실장 겸 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비서관 재직 시 농지개혁, 농협조직, 농민신문 발행 등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조봉암 장관과 함께 1949년 2월 사임했다.

1951년 6월 조봉암 국회부의장과 함께 사무국 책임자로 조봉암 중심의 진보적 반(反) 이승만 신당운동을 전개했다.

1951년 12월 ‘대남간첩단 사건’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1심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이후 전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구형을 받은 사람은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석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1956년 1월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된 후 3월 병보석으로 나와 종로 신용균(申龍均) 내과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4월 10일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 망명 후 조봉암 구명운동을 주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선신문을 창간했다. 해외평화통일운동 추진체로서 조선민족통일회의를 발족했다.

4·19 이후 1961년 2월 한국에서 조용수가 진보성향의 일간지 민족일보를 창간하는 것을 후원하기 위해 재일동포사회에서 자금을 모았다. 민족일보 창간과 함께 통일운동추진연합전선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을 위해 일본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양측인사의 교류를 실현시키는 데 힘썼다. 그의 주선으로 1961년 2월부터 3월 사이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조영주 단장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한덕수 의장 간의 연석회의가 2회에 걸쳐 개최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소는 그가 일본에 있는 간첩이라는 혐의로 그의 자금을 받은 민족일보를 폐간시키고 발행인 조용수에 사형을 구형했다. 1962년 8월 그는 재일한국정치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다수 통일운동가들의 일본 내 활동을 도왔으며, 1964년~1968년에 통일조선연감을 발간했다. 이 연감은 통일문제의 경과, 통일운동사, 통일실현의 방법, 통일문제관련 내외자료를 수록한 것으로 통일실현방법, 통일 후의 국가구상까지 망라한 통일이론을 담고 있다.

통일운동추진을 위한 조직으로 1965년 7월 ‘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본부’를 결성하고 대표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66년에는 4·19혁명 6주년을 기념해 도쿄[東京]에 통일운동 간부 양성기관인 통일학원을 설치했다. 1970년 11월 도쿄에서 ‘민주조국통일회의’를 결성했으며, 결성대회 기조보고에서 북한을 “개인숭배를 기조로 하는 전근대적 지배체제”라고 언급하며 북한의 세습체제를 비판했다.

1972년 9월 통일일보를 발간하고, 이를 통해 북한의 호전성을 규탄하고 한국의 통일정책과 경제성장에 성원을 보냈으며, 한국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 내 대표적인 친한파 신문으로 성장시켰다. 1974년 7월에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에 통일일보 서울지사를 두었다.

이와 함께 남북교류의 일환으로 조총련 동포의 모국방문단 사업을 발상해 추진한 결과 1975년 9월 조총련계 동포의 추석성묘단 방문을 성사시켰다. 1977년 10월에는 남북이질화 심포지움에 이용희 통일원 장관의 초청을 받아 내한했다. 19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 동서인 주일공사 최세현(崔世鉉)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내각책임제 개헌을 건의했으며, 1980년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전단계로 내각제 개헌과 남북한 정상회담 개최를 주장했다.

1984년 뇌혈전으로 반신이 마비되었고, 1987년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1990년 5월 14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그가 타계한 직후 정부는 1990년 5월 25일 통일을 위한 노력을 인정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죽산 진보당에 관한 두 견해」(남재희, 『한겨레』, 2013.7.25)
「남재희 회고: 문주 40년 통일일보 사장 이영근」(남재희, 『프레시안』, 2002.2.9)
「여운형 건준의 좌절: 통일일보 발행인 고 이영근 회고록」상·하(『월간조선』, 1990.8~9)
「통일일보 회장 이영근씨」(『동아일보』, 1990.5.15)
「민족일보 사건 공소장 전문」(『동아일보』, 1961.7.30)
「이영근에 유죄판결」(『자유신문』, 1953.12.22)
「이영근의 간첩행위 확실, 김용도 의식적으로 협조」(『자유신문』, 1952.1.11)
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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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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