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복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수신면 복다회리에서 마을 주민과 함께 아우내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격을 받아 다음날인 4월 2일 순국하였다.
1869년 9월 10일 태어났고, 1919년 4월 2일 사망하였다.
1919년 4월 1일 전개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일어난 3 · 1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이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고향에 내려와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동네 어른인 조인원(趙仁元) 등에게 보이고 서울의 상황을 자세히 보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천안군 갈전면(葛田面)에서는 조인원을 중심으로 김구응(金球應) · 김상철(金相喆) · 박종만 등이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고, 인근 수신면(修身面)에서는 홍일선(洪鎰善) · 김교선(金敎善) · 한동규(韓東奎) · 이순구(李旬求), 성남면(城南面)에서는 이백하(李伯夏) 등이 함께하기로 결의하였다. 박유복은 수신면 복다회리(卜多會里)에서 김상훈(金相訓), 김상헌(金尙憲) 등 마을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였다.
4월 1일 오후 1시경,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병천의 아우내 장터로 모였다. 조인원 등이 먼저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에 모인 군중 500~600명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김교선 · 김상철 등도 합류하였고, 시장에 있던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호응하여 시장 일대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뒤 헌병 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총칼을 휘두르고 군중들에게 실탄을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났고, 시위 군중은 일단 후퇴하였다. 일시 해산했던 군중들은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재집결하여 헌병 주재소로 몰려가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였고, 일본 헌병은 다시 총을 쏘아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시위 군중은 부근의 산과 시장에 모였다가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시위를 벌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세 차례에 걸친 일본 헌병들의 무력 진압으로 6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함께 참여한 김상헌은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박유복은 부상을 당하여 다음날인 4월 2일에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