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규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운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고 시위하였다. 일본군의 총격을 당해 4월 2일에 순국하였다.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1880년에 태어났다. 1919년 4월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순국하였다.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되었다. 아우내장은 충청북도 청주와 진천, 그리고 천안군의 장꾼이 모이는 큰 장이었다. 장날인 4월 1일 약 3,000여 명의 군중들이 아우내 장터에 모였다.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東奎), 이순구(李旬求), 조인원(趙仁元), 유관순(柳寬順) 등이 갈전면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니 온 천지가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군중에게 태극기가 나뉘어졌고, 군중은 열을 지어 큰 깃발을 선두로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시위 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였다. 또한,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서, 야만적인 발포를 계속함으로써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날 오후 4시경 약 40명이 주재소에 몰려가 적극적인 항의를 하였다. 군중들은 헌병들의 총부리에 달라붙고 탄약갑을 잡아당기면서 격투를 벌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의 야만적인 발포가 또다시 있었고, 박상규(朴相圭)도 일본 군경의 흉탄에 맞아 이튿날 4월 2일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06년 박상규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