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10월 12일 출생으로, 전라남도 구례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중등과와 니혼대학[日本大學] 정경과를 졸업했다.
1926년 설립한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1930년대 현금 80만 원 이상을 가진 대자산가로, 전라도의 대지주였고, 함경남도 안변에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교육, 소년 등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7년부터 왕십리에 있는 왕신청년회에서 경영하는 왕신학원(旺新學院)을 지원했다. 1929년에는 왕신학원 원장으로 경영일체를 인계받아 운영하다가 거금을 기증해 교사를 신축했다.
1929년 1월 당시 서울 천도교 홍제소년군(弘濟少年軍) 단장으로 재임하면서 소년운동에 기여했다. 1929년 어린이날 준비 특별위원으로 위촉되었고, 같은 해 6월 20일 『소년시대』라는 아동잡지 창간호를 발행했다.
1933년 5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 경리부에서 활동했고, 같은 해 7월 발명학회 이사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자주 거액의 의연금을 기탁했는데 1933년 7월 낙동강 연안 수해민 의연금, 1936년 1월 설날 서울 빈민에게 헌금과 쌀 분배, 1936년 9월 수재의연금, 1938년 구례읍 화재로 인한 이재민 구제금을 지원했다.
1937년 10월 럭비연맹 회장, 1938년 축구협회 고문으로 위촉되었고, 1938년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40년 7월 가네다 쿠니모토[金田國本]로 개명하고 그해 8월 설립한 경인기업 상무이사로 참여했다.
해방 후 경인기업주식회사 취체역, 세브란스의약품 주식회사 취체역, 서울중앙연료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하는 한편 고아수양구례홍제원을 경영했다. 1947년 8월에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활동을 후원해 20만원을 출연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거에 전라남도 구례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국회 산업노동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1949년 6월 국회의원 141명과 함께 주한미국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서에 날인했다. 같은 해 8월 한국민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에 가입했다.
1949년 10월 개정된 국회법에 따른 상임위원회 개선으로 재정경제위원회에 소속되었다. 1950년 4월 조병옥을 후임 국무총리로 추천하는 연서에 서명했다. 1950년 세브란스 의약품 주식회사 대표를 맡고 활동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