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윤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전라남도 곡성군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이후,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한 교육자 · 대종교인 · 독립운동가.
이칭
백당(白堂)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4년 6월 15일
사망 연도
1961년 8월 27일
본관
평산(平山)
출생지
전라남도 담양군
주요 저서
『정사(正史)』|『삼일신고강의(三一神詁講義)』
대표 상훈
대통령표창|건국훈장 애국장
내용 요약

신태윤은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곡성군의 3 · 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9일 곡성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곡성군 청년들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계획 · 준비하였고, 3월 29일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5년 『삼일신고강의』를 발간하였고, 해방 후 곡성군 건국준비위원장과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전라남도 곡성군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이후,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한 교육자 · 대종교인 ·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외동리 출신으로, 1884년 6월 15일 출생하여 1961년 8월 27일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의관(議官) 신석용(申錫龍)이다. 신태윤(申泰允)은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09년 곡성보통학교훈도(訓導)로 취임하였다. 나철(羅喆)과 교유하면서 대종교 신자가 되었다.

주요 활동

3 ‧ 1운동 당시 신태윤은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梧谷面) 오지리(梧枝里)에 거주하며, 곡성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를 맡고 있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1919년 3월 중순, 신태윤은 정래성(丁來聖), 김중호(金仲浩), 양성만(梁成滿), 박수창(朴秀昌), 김기섭(金基燮), 김태수(金泰洙) 등 청년들을 규합하여 3월 29일 곡성읍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작성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3월 29일 장터에 군중들이 모이자, 신태윤은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다가 일제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신태윤은 1925년 대종교의 교리를 다룬 『삼일신고강의(三一神詁講義)』를 발간하였으며, 주1주2를 강요받았지만 거부하고 칩거하였다. 광복 후 곡성군 건국준비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조선대학교가 설립되자 사학과 교수로 재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사상과 작품

저술로 『정사(正史)』, 『삼일신고강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독립유공자공훈록』 3(국가보훈처, 198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국가보훈처, 197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국가보훈처, 19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국가보훈처, 1971)
주석
주1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 개명하게 한 일

주2

일제가 일본의 조상과 왕을 모시는 신사(神社)에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

집필자
이혜영(화성시청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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