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유생으로 자는 용직(用直), 호는 항재(恒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호조판서 이경직(李景稷)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이조판서를 지낸 이정영(李正英)이고, 조부는 병조참판과 이조참판을 지낸 이대성(李大成)이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격물(格物)’에 대한 인식 차이를 비판하고 양자를 절충하려고 하였다.
아버지 이진휴(李眞休)와 어머니 풍양조씨(豊壤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8세에 양친을 여의어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으며, 1714년 14세에 사인(士人) 변치은(邊致殷)의 딸 황주변씨(黃州邊氏)와 혼인하여 슬하에 이경익(李敬翊)과 이춘익(李春翊) 아들 둘을 두었다.
문학에 뜻을 두어 널리 백가(百家)를 섭렵하였다가, 20세에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사상(士相) 민옥(閔鈺)과 비경(飛卿) 조진빈(趙震彬)과 종유하면서 서로 강학하였고, 그 뒤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정제두로부터 양명학을 익혔다.
키가 크고 얼굴은 옥과 같았으며, 성품은 곧아서 남과 사귈 때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다. 가문이 몰락하여 피폐해진 뒤로는 자취를 끊고 달리 구하는 것이 없었다. 1744년 6월 오한병(惡寒病)이 들어 24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45세였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목희리)에 있다.
정제두와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鄭厚一)에게 수학하여 심학을 배웠다. 심육(沈錥)과 이진병(李震炳)이 수습한 정제두의 유고(遺稿)를 교감하였으며, 정제두의 『유사보유(遺事補遺)』를 엮었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강화도에 들어가 정제두를 만나 양지학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 「의주왕문답(擬朱王問答)」을 지어 양명학이 이단이 아님을 변별하였다.
이광신의 학문적 특성은 주자학과 양명학을 절충하려고 한 점에 있다. 이광신에 의하면,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격물(格物)’에 대한 풀이에서 연원한다. 즉 주자는 ‘격(格)’을 ‘지(至)’로 해석하여 격물을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이른다.’고 풀이한 반면에, 양명은 ‘격(格)’을 ‘정(正)’으로 해석하여 격물을 ‘본원을 정성스럽게 하고 바르게 하는 공부’라고 풀이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대의 학자들 가운데 양명학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주자학에 대해서 사물을 앞세우고 본원을 뒤로 돌려 자신을 되돌아보는 핵심적 공부가 없음으로 인해 지리한 병폐가 있다고 비판하고, 주자학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양명학에 대해서 본원에만 매달린 채 사물은 내다 버려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가 없고 단계를 뛰어넘는 폐단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주자학과 양명학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궁리(窮理)와 성신(誠身) 두 가지 공부를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대학』의 ‘격물’에 대한 풀이의 차이에 치우쳐서 서로를 비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