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여선(汝善), 호는 각암(覺菴)이다. 경상도 대구에 살던 서인계 학자로 김장생(金長生)에게 수학하였으며, 동문인 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하였다. 1637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으며, 1642년 모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상기(喪期)를 마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아버지는 전시헌(全時憲)이고, 어머니는 밀양손씨로 참판을 지낸 손영제(孫英濟)의 딸이다. 부인은 덕산이씨(德山李氏)로 이계잠(李繼潛)의 딸로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전극효(全克孝), 차남은 전극흠(全克欽), 삼남은 전극명(全克明)이며, 딸은 채지기(蔡之沂)·안응정(安應井)에게 시집갔다.
1605년(선조 38) 4월 12일 대구부 수성현(壽城縣) 파잠리(巴岑里) 집에서 출생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 8세 때 이미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노성한 사람과 같았다. 그 해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나이가 들면서 여러 고금의 서적을 박람하였는데, 『소학』의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 세 가지를 근본의 본체로 삼고, 가언(嘉言)·선행(善行) 두 가지를 말단의 작용으로 삼아 실천하여 사람들이 몸소 실천하는 군자라고 하였다.
1624년 가을 형 전유익(全有翼)과 함께 한양에 가서 사마시(司馬試) 회시(會試)에 응시하였다. 형이 합격하였으나 객지에서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형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른 뒤, 다시는 과거장에 나아가지 않았다.
1631년 부친의 명으로 동생 전유장(全有章)과 함께 김장생(金長生)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스승이 독서의 차례에 대해 먼저 『소학』과 『주자가례』를 읽고, 그 다음 『심경』과 『근사록』을 읽어 근본을 배양하여 문로(門路)를 열어놓은 뒤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으라고 하자, 그 말씀을 받들어 차례차례 독서하였다. 송시열·이유태·강흡(姜恰) 등과 종유(從遊)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1642년 모친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여 역병에 걸려서 이듬해 정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대구 각계산(覺界山) 서쪽 기슭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문학에 조예가 깊어 조정에 나아갈 만하였는데, 과거를 포기하고 또 단명하였다. 문집에 실린 시를 보면, 맨 앞에 『소학』 및 사서를 노래한 시가 있다. 또한 어려서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할 적에 뜰 앞의 반송을 보고 “솔이 눈과 서리 늠름하게 참아날 때, 뒤늦게 시드는 이유를 나는 이에 알았네[凜耐雪霜時 後凋我乃知]. 천고의 훗날까지 변치 않게 근본을 배양하면, 진시황이 어찌 벼슬에 봉하려 하겠는가[栽培千古下 秦帝肯封爲].”라고 읊자, 사람들이 굳센 절개와 고상한 의리가 들어있다고 칭찬하였다.
빼어난 시재(詩才)가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나 오언고시 5수, 오언절구 6수, 오언율시 9수, 칠언절구 23수, 칠언율시 14수가 문집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잡저에는 삼강령·팔조목·총론 세 부분으로 된 「대학집해(大學集解)」가 실려 있는데, 이 가운데 팔조목을 해설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사부모잠(事父母箴)」·「화형제잠(和兄弟箴)」·「순부부잠(順夫婦箴)」·「교붕우잠(交朋友箴)」·「계자질독서과농잠(戒子姪讀書課農箴)」 등 5편의 잠(箴)과 문장과 요지가 정밀하고 긴절하다고 알려진「도학설(道學說)」이 있다.
3권 2책의 『각암집(覺菴集)』이 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 수습되어 20세기 초에 간행된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저술이 있었지만, 중간에 소실되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