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자를 주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벼슬로 ‘신지선인(神誌仙人)’이라고도 한다.『태백일사(太白逸史)』「신시본기(神市本紀)」에 따르면, 환웅시대의 신지 혁덕(赫德)이라는 사람이 고대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며(桓雄天皇 又復命神誌赫德 作書契),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서는 신지 혁덕이 구전으로 전해지던 『천부경(天符經)』을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桓雄大聖尊 天降後 命神誌赫德 以鹿圖文記之). 또한 단군시대의 신지 발리(發理)가 『신지비사(神誌祕詞)』를 지었다고 하며, 옛 삼신 제사의 서원문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神誌祕詞 檀君達門時人 神誌發理所作也 本三神古祭誓願之文也). 이와 유사한 내용이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태시기(太始記)」에서 “환웅이 신지에게 글자를 만들도록 명하였고, … 신지는 사냥 나갔다가 … 사슴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다(又使神誌氏作書契 … 一日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踪 …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旋復猛省曰 記在之法 惟始斯而已夫 如斯而已夫)”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흥법(興法)」에 따르면, 『신지비사』는 고구려시대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 ‘김위제조(金謂磾條)’를 보면, 김위제는 나라의 도읍을 정할 때 갖추어야 할 지리적 특징을 『신지비사』의 내용에 따라 “저울에 비유하자면 저울대는 부소요, 저울추는 오덕을 갖춘 땅이며 극기는 백아강이다. 위 세 곳에 도읍하면 70국이 항복해서 조공하여 올 것이고, 그 지덕에 힘입어 신기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又神誌秘詞曰 ‘如稱錘·極器·稱幹·扶疎·樑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저울 머리와 꼬리를 정밀히 하여 수평을 잘 잡으면 나라가 흥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요, 가르쳐 준 세 곳에 도읍하지 않는다면 왕업이 쇠퇴하리라(精首尾 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라고 언급하고 있어 『신지비사』를 도참서의 일종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려사』의 김위제와 관련한 내용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성호사설(星湖僿說)』·『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먼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16장」의 주에는 “신지를 단군 때의 사람으로 신지선인이다(神誌檀君時人 世號神誌仙人).”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천지문(天地門)」의 ‘고려비기(高麗秘記)’에는, “『신지비사』는 누가 지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우리나라 조선의 문명지치(文明之治)를 거슬러 볼 수 있으니 기이하다(神誌秘詞者 不知誰某之作而亦能逆覩我聖朝文明之治者 可異也).”고 하였다. 또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부권하(附卷下)」의 ‘지리고(地理考)’에서도 “『고려사』 ‘김위제’전에 신지선인의 『비사』를 인용하여, … 신지는 단군 때의 사람이다(麗史金謂磾傳 引神誌仙人秘詞 … 世傳神誌 檀君時人).”라고 하면서, 권람(權擥, 1416~1465)의 『응제시주(應製詩註)』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出權擥應制詩註).
신지가 환웅과 단군시대에 글자를 담당한 관리라고 한다면, 한문을 사용하기 이전 고대 한국에서도 일정한 형태의 글자가 있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