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賤人)은 전근대사회에서 양인(良人)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신분이었다. 천인은 역(役)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했지만, 그중 대다수는 노비였다. 그래서 보통 ‘면천(免賤)’이라고 하면, 노비가 본래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통상 노비는 부세와 군역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조선 정부는 재원과 군역 자원 확보를 위하여 합법적으로 면천을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면천법의 확대로 인하여 신분제가 동요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노비제도는 대체로 태종조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태종 대의 노비 정책은 양민 확보를 위해 추진된 것이었으나,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태종 대 이후 ‘양소천다(良小賤多)’ 현상은 여전하였고, 국역 부담자의 확보를 위한 양민 확보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군공(軍功), 사민(徙民), 포도(捕盜), 납속(納贖) 등의 경우 면천의 혜택이 주어졌다. 그러나 면천은 부분적인 범위에서만 가능하였을 뿐, 대규모 면천 정책을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유교적 신분질서의 확립을 요구하는 관료 지배층의 반대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면천은 꾸준히 시행되었다. 제도적으로 보면, 군공과 납속에 의한 면천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에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병력을 확보하고, 적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과를 실시하여 천인에게 면천의 기회를 주었다. 면천의 대종을 이루는 것은 납속 종량이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는 조선 전기와 달리 노비의 종량이 용이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조응하여 1730년(영조 6)에는 노양처소생 종모법(奴良妻所生從母法)이 실시되었고, 1801년(순조 1)에는 내시노비(內寺奴婢)가 종량되었다. 그리고 1886년(고종 23) 노비가 세습되던 제도를 폐지하였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실시되면서 노비제도는 폐지되었다.
군공 면천(軍功免賤)은 국내외적으로 전란이나 변란을 당하여 국가가 곤경에 처하게 될 때 군사적 공로에 의해서 면천종량을 허락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왕조는 건국 직후인 1405년(태종 5)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永爲遵守奴婢決折條目)」을 반포하면서 노비는 일시적인 공로에 의해서 ‘기신방역(其身放役)’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러한 규정은 조선시대 내내 준수되었는데, 일례로 1460년(세조 6) 여진정벌에 대한 공로를 논하면서 천인을 면천하여 주었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 노비 역시 모두 면천하여 주었다.
사민 면천(徙民政策)은 북변 지역의 국방 내지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천인을 이주시키는 대신, 그 보상으로 면천해주는 방법이다. 사민은 세종 대에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세종 대 대여진(對女眞) 정책의 일환으로 북변 지역, 특히 함길도의 방어체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민을 실시하면서 노비의 면천을 공인하여 주었다. 사민 면천은 성종 대까지 시행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거의 실시되지 못하였다.
한편 강도(强盜)를 잡은 것에 대한 포상으로 주어지는 포도 면천도 있었다. 포도 면천은 세종 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대전속록(大典續錄)』의 반포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속대전(續大典)』이 반포되면서 강도를 잡은 천인은 면천되지 못하고, 면포를 시상으로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명화적(明火賊)을 5인 이상 잡은 천인에게는 면천의 특혜를 주었다.
납속 면책(納粟免策)은 국가에 곡식을 헌납하면, 그 반대 급부로 천인의 경우 면천을 허락해주는 정책이었다. 납속은 군수 납속과 진휼 납속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군수 납속은 전란이나 변란시에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휼 납속은 기근시에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납속 면천은 조선 전기에는 널리 시행되지 못하다가 양란을 겪은 17세기부터 널리 시행되었다.
17세기 이후 가장 널리 적용된 면천 방법은 납속이었다. 납속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실시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국가에 흉년에 들면 진휼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하였다. 따라서 재력이 있는 노비는 누구나 납속책에 수응하여 면천을 허가받고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조선 후기 노비 속량가는 쌀 160석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었으나, 1662년(현종 3)에는 50석으로 낮아졌으며, 1718년(숙종 44)에는 납속 속량가를 1530세는 50석, 3140세는 40석, 4150세는 30석, 5155세는 20석, 56~60세는 10석으로 차등 지정하였다. 영조 대에 들어와서는 납속과 함께 납전(納錢)을 통한 면천도 실시되었다. 『속대전(續大典)』에는 공사천의 속량하는 가격을 동전 100냥 이하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엄격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사회였다. 더구나 노비의 신분 세습은 ‘일천즉천(一賤則賤)’으로 부모 중 한 명만이 천인인 경우에도 자녀는 노비로 귀속되고 있어서 이들의 면천과 종량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에서 노비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면천법을 성문화하여 일정한 제한 속에서 노비들에게 면천의 혜택을 주었다. 이는 조선왕조 신분제의 폐쇄성을 방지하고자 한 조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17세기 이후 전개된 노비 면천의 확대는 신분제를 동요시켰고, 결국 1894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가 폐지되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