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교회는 1901년 마산포교회로 시작되었다. 1919년에 문창교회로 개칭하였고, 기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주기철 목사가 1931년부터 6년간 시무하였다. 1970년 9월 고신파가 분리되면서 제일문창교회를 새로 설립했다.
호주 선교부와 북장로교 선교부의 공동 선교 구역이었던 마산은 두 갈래로 개신교가 전래되었다. 먼저 1901년 백도명의 전도로 김마리아와 김인모 등 7명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 교회는 북장로교 선교사 로스(Cyrill Ross)의 지도를 받았다. 또 하나는 호주선교사 아담슨(Andrew Adamson)위 영향을 받아 이승규가 세운 교회였다.
종종 분쟁을 겪던 두 교회는 결국 통합하여 마산포교회가 되었다. 이승규는 아담슨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성호리에 있던 마산포교회당에 독서숙을 세우게 되는데 이 학교는 1909년 당시 대한제국 학부의 인가를 받아 마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911년 상남동에 자리 잡았던 마산포교회는 그 후 1919년 길 건너편의 문창리(추산동의 옛 지명)에 석조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이사했고, 이때 교회 이름을 문창교회로 개칭했다. 1931년 7월 부임하여 1936년 7월 평양산정현교회로 이임할 때까지 문창교회에서 목회한 주기철 목사의 사역 장소는 바로 이곳 문창리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마산 지역의 3·22만세운동의 주역은 바로 문창교회 교인들과 창신·의신여학교 학생들이었다. 주동자였던 이상소는 문창교회 장로이면서 창신학교 학감이었고, 임학찬은 교인이면서 의신여학교 교사였다.
1970년 9월 내부 갈등으로 고신파가 신축 예배당으로 이전하면서 제일문창교회로분리되었다. 상남동 87-1번지 구예배당 자리에는 1970년에 지어진 제일문창교회의 예배당 일부와 최근 신축된 주기철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주기철기념관 바로 옆에는 이곳이 옛 창신학교 터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그만 비석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