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烙畵)는 인두나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종이, 나무, 가죽 등의 표면을 지져서 그림이나 문양, 글씨 등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법상으로 낙죽(烙竹)과 관련이 있으며, 혼용되기도 한다.
낙화는 회화에서 모필(毛筆)로 구현되는 대부분의 준법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인두를 다루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여 공예적 성격이 있다.
낙화장은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종목 지정되었고, 2018년 12월 27일 김영조(金榮祚)[남, 1953년생, 충청북도 보은군]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에 앞서 김영조는 2010년 충청북도의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된 바 있으나,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충청북도 무형문화재에서는 해제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은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낙화변증설(烙畵辨證設)’에서 중국의 낙(烙)을 소개하면서 조선에서 낙을 잘하는 사람으로 박창규(朴昌奎, 17961861년)를 언급하였다.
박창규는 낙화를 잘하여 한양의 양반관료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그의 낙법은 후손들에 의해 집안 내림으로 전승되어 낙화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박계담(朴桂淡)은 박창규의 재종손으로 20세기 초 일본에까지 유명했는데, 1915년 9월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오년기념(始政五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29년 9월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의 전라북도관에서 낙화 제작을 시연하였는데 당시의 모습이 박람회 화보에 실렸다.
일제강점기에 백남철(白南哲), 백학기(白鶴起)로 이어지는 백씨 집안에도 낙을 잘하는 사람이 여럿 나왔다. 특히 백학기는 1920년대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낙화가로 활동하였다.
2019년 낙화장 보유자로 인정된 김영조는 전창진(田昌鎭, 1946~?)에게서 낙법을 배웠는데, 전창진은 백학기를 사사한 최성수(崔聖洙, ?~1985)로부터 배운 것으로 전하여,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에 이르는 낙화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