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고운사 연수전 ( )

의성 고운사 연수전 전경
의성 고운사 연수전 전경
건축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에 있는 조선후기 어첩(御帖)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건물. 유교건물.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에 있는 조선후기 어첩(御帖)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건물. 유교건물.
개설

국왕의 어첩(御帖)을 봉안한 사찰 안의 특이한 건물로, 20세기 초에 다시 건립되었지만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에 장식성이 잘 더해져 있다.

역사적 변천

건물은 등운산 골짜기를 따라 형성된 사역(寺域)의 요사채 영역에서 남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어첩을 봉안하려고 건립되었는데, 그 뒤 불탔다가 1902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지금 걸려 있는 편액은 1904년에 김성근(金聲根)이 칙서를 봉안하면서 제작하였고, 이 때 현재 남아 있는 벽화도 제작되었다.

내용

건물은 만세문(萬歲門) 안쪽에 좁은 마당을 두고 축선에 맞추어 건립되었다. 만세문을 중심으로 연수전을 네모나게 에워싸는 토석담[土石墻]을 쌓았는데, 뒤로 갈수록 높게 층단을 두었다. 낮은 담장의 높이에 비해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였으므로, 산자락을 배경으로 위엄을 가지면서도 개방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만세문은 전형적인 솟을삼문으로, 앞면에는 3단의 계단을 둔 한벌대의 기단을 구성하였으며, 방주초석 위에 원기둥을 설치하여 앞면 3칸, 옆면 2칸의 주칸[柱間]을 형성하였다. 대보의 가운데 아랫부분에는 높이가 낮은 네모난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두고서 도리통에 판장문(板長門)을 달았으며, 인방재 윗면에는 홍살과 화반을 설치하였다. 가운데칸인 어칸에는 초익공 구조를 두고, 좌우의 퇴칸[退間]에는 민도리 구조를 적용하였으며, 모든 도리는 모를 접은 납도리이다. 어칸과 좌우 퇴칸 사이에 층단을 둔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금단청(錦丹靑)을 적용하였다. 앞면 어칸의 창방(昌枋) 윗부분에는 ‘만세문(萬歲門)’이라고 쓴 편액이 걸렸다.

건물은 다듬은 돌을 바른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리하는데, 앞면은 지대석 위에 3켜의 장대석을 쌓고 갑석을 올린 모습이며, 좌우 옆면과 뒷면은 한벌대로 되어 있다. 주칸은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도리통의 어칸과 양통의 어칸은 각각 9자와 8자, 그리고 좌우 퇴칸은 5자로 계획하였다. 다듬은 항아리형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놓았는데, 건물의 고주(高柱)는 4개이고, 평주(平柱)는 12개이다. 바깥쪽 평주 사이의 주칸은 개방되었지만, 안쪽 고주 사이의 주칸에는 판벽(板璧)과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실(室)을 구성하였다. 모든 주칸은 우물마루로 구성되었는데, 외부 평주열의 바깥쪽으로는 2자를 더 내밀어서 쪽마루로 마루를 늘렸고, 끝부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하였다. 난간의 네 곳 모서리는 접은 상태이고, 앞면 가운데에는 출입을 위하여 계자난간을 생략하였다.

외부 평주의 이익공(二翼工) 구조는 창방과 초익공을 결구하여 주두(柱頭)를 올리고, 그 윗면에 두공(枓栱)과 이익공을 결구하여 재주두(再柱頭)를 설치하였다. 초익공의 바깥쪽 끝부분에는 활짝 핀 연꽃을 앙서[仰舌]의 윗부분에 두었고, 이익공의 바깥쪽 끝부분에는 연꽃 봉오리를 수서[垂舌] 아랫부분에 두어 장식하였다. 툇보의 바깥쪽 끝부분은 곧게 자르고서 봉황두(鳳凰頭)를 끼웠으며,귀기둥에는 전각포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 후기의 이익공 구조를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도리통과 양통의 어칸에는 창방의 가운데에 주간포(柱間包) 형식의 화반을 설치하였다. 창방을 받을장으로 하여 초익공 부재를 결구하고 주두를 올렸지만, 툇보가 없기 때문에 재주두는 생략하였고, 툇보 위치에 바깥쪽 끝부분은 봉황두를 새기고 안쪽 끝부분에는 활짝 핀 연꽃을 장식한 부재를 끼웠다. 어칸의 주칸 길이를 보다 길게 하고서 주간포 형식의 화반을 더한 것은 중심부를 강조하기 위한 독특한 의장(意匠)인데, 왕실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서 중심부 화반의 장식을 이익공 주간포 형식으로 극대화한 것으로 보인다.

실(室)의 남쪽 칸에는 문틀을 세우고서 들어열개 사분합문을 달았는데, 윗부분은 판벽으로 만들고 ‘연수전(延壽殿)’ 편액을 걸었다. 북쪽 칸은 중인방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판벽으로 구성하였고, 동서 옆칸은 아랫부분에만 판벽을 두고 윗부분에는 남쪽으로 치우치게 살창을 달았다. 실 안에는 북쪽으로 벽장형 감실(龕室)이 설치되었는데, 앞면에는 숫대살을 구성한 사분합창이 달렸다.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완만한 곡선의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끝부분에는 각각 망와(望瓦)를 설치하였다. 지붕면의 끝선은 와당을 가진 수막새와 암막새로 마감하였고, 동서의 합각부는 기와 조각을 쌓은 회벽으로 마감하였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화려하게 금단청을 하였는데, 특히 실의 안팎에는 창호를 제외한 판벽과 천장에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는 벽화를 그렸다. 곧 동쪽 면에는 중인방 아랫부분의 판벽에 연꽃과 해, 한 쌍의 거북을 그린 연화도(蓮花圖)가 있고, 윗부분의 창선에는 ‘용루만세(龍樓萬歲)’의 글귀와 함께 좌우에 태극무늬를 그렸다. 서쪽 면에도 판벽과 창선에 각각 구름과 달, 한 쌍의 용을 그린 운룡도(雲龍圖)와 함께 태극무늬 가운데 ‘봉각천추(鳳閣千秋)’의 글귀가 쓰여져 있다. 북쪽 면에는 중인방을 기준으로 위아래에 각각 장생도(長生圖)가 있는데, 윗부분에는 매화나무와 달, 한 쌍의 학, 영지버섯 등을 그렸으며, 벽화를 그린 시기가 1904년임을 알 수 있는 글귀가 적혀 있다. 아랫부분에는 소나무와 해, 일각수(一角獸)가 그려져 있으며, 태평세월을 알리는 글이 있다. 천장에는 남쪽에 1쌍의 청룡 그림과 함께 나머지 부분에는 16마리의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이 건물의 기단은 18세기 중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1902년에 다시 건립된 지금의 건물에는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에 충실하면서도 높은 위계를 반영한 장식 기법이 잘 적용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상(조선총독부 내무부지방국, 1911)
『경북오본산고금기요』(강유문, 경북불교협회, 1937)
『한국사찰전서』상(권상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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