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순조 21)에 향중 유림들이 혜강공(惠康公) 양팽손(梁彭孫, 1488∼1545)과 그의 증손인 장춘(長春) 양신용(梁信容)의 학덕을 기려 위패를 봉안하고 세운 사우이다. 1985년 2월 25일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1821년에 양팽손과 양신용을 배향하기 위해 지방 유림이 창건하였다. 사우는 원래 지금의 순천시 해룡면 중흥리에 있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0년에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면서 용강서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양팽손의 본관은 제주, 호는 학포(學圃)이다. 1488년 전라도 능성현 쌍봉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양이하(梁以河)에게 학문을 배웠고, 1503년 이후에는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조광조는 그를 ‘수세대기(需世大器)’에 견주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삭직되었다가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사사된 후에 복직되었다. 특히 호남 화단의 선구자로 윤두서(尹斗緖, 1668∼1715), 허련(許鍊, 1809∼1892)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힌다. 저서로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전한다.
양신용은 양팽손의 증손으로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에 이르렀다. 천성이 강직하였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나이든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아들 양유남(梁有南)을 의병장 양만용(梁曼容)에게 보내 싸우게 하였다.
외삼문인 지춘문(遲春門)을 들어서면 좌우로 동서재가 있고 중앙에 용강서원이라고 편액한 강당이 있다. 바로 뒤의 내삼문을 들어가면 낙천사(樂天祠)가 있다. 낙천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외삼문과 사당은 1994년에 보수하였다. 향사일은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