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 때 학자인 혁련정(赫連挺)이 1075년(문종 29)에 지은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의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병서(大華嚴首坐圓通兩重大師均如傳并序)」에 균여가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10권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전하지 않지만 당(唐) 지엄(智儼, 602∼668)이 저술한 『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일명 『화엄경수현기』 혹은 『수현기(搜玄記)』)에 대한 기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균여는 해인사 희랑(希朗)의 법손으로 고려 광종대에 귀법사에서 화엄종단의 통일정책을 시도한 승려이다. 신라 말부터 선종이 대두하면서 화엄종에 대한 비판이 거세어지자 화엄종 측에서도 교리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시대적 과업으로 균여는 화엄학의 저서들을 본격적으로 재검토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중국의 화엄학으로서는 지엄과 법장(法藏), 그리고 의상(義湘)의 저서들에 대하여 주석서를 발간하였다.
한편 균여가 활동하던 광종대는 교선통합뿐만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는 시대적 사명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균여는 불타발다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권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해석하여 화엄종의 교리를 체계화한 『화엄경수현기』에 대한 기문인 『수현방궤기』를 발간하였던 것이다.
『수현방궤기』는 균여의 화엄사상의 경향을 잘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즉 균여의 화엄학은 중국 초기의 화엄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주안점은 성상융회(性相融會)에 있었다. 이것은 광종대 전제왕권을 수립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있을 때에 그것을 긍정하는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