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충숙왕 대 국사(國師)를 지낸 승려 혼구의 저술이다. 2권으로 구성되었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혼구는 휘(諱)이며, 자는 구을(丘乙)이다. 호는 무극노인(無極老人)이다. 10살 때에 무위사(無爲寺)의 천경선사(天鏡禪師)에게 출가하였다. 구산(九山)의 승과(僧科)에서 장원 급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지만, 내버리고 일연(一然)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스승의 자리를 이어 강당을 열게 되자, 여러 사람을 거느릴 때는 규율 있게 하고, 불경(佛經)을 강의할 때는 하나로 그어 놓은 것같이 하였다. 충선왕(忠宣王) 즉위 후에는 그에게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을 제수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부음을 듣고 슬퍼하였으며 보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은 묘응(妙應)이라고 명명하였다. 저술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 2권을 비롯하여 『어록(語錄)』, 『가송잡저(歌頌雜著)』, 『중편염송사원(重編拈頌事苑)』 등이 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배고파 괴로워하는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양 무제는 떠도는 고혼(孤魂)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광종대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경기 화성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고려 말 일연의 제자 혼구가 『신편수륙의문』을 찬술함으로써 이 수륙재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