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안의 활터와 도성 밖의 활터 간에 두 편이나 세 편으로 갈라서 활쏘기를 하는 일종의 경기이다. 장안은 수도인 한성을 뜻하고, 편사는 편을 갈라 활쏘기를 한다는 뜻이다.
편사놀이의 종류로는 활터 간 터편사(射亭便射), 고을 간 골편사(洞便射), 성내와 성외 간 장안편사(長安便射), 사랑 간 사랑편사(舍廊便射), 사계 간 사계편사(射稧便射), 한량 간 한량편사(閑良便射), 한량과 출신 간 한출편사(閑出便射), 세 계급 간 삼동편사(三同便射), 남촌과 북촌 간 남북촌편사(南北村便射), 아동 간 아동편사(兒童便射) 등이 있다.
임진왜란 후, 선조 때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안에 오운정(五雲亭)이 설치되는데, 그 후 장안 서촌(西村)에 오사정(五射亭)이 생긴다. 오사정은 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 필운동의 ‘등과정(登科亭)’, 옥동의 ‘등룡정(登龍亭)’, 삼청동의 ‘운룡정(雲龍亭)’,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등이다.
사정터는 점차 확대되어, 윗대 5터로는 상선대(上仙臺), 세송정(細松亭), 왜장대(倭將臺), 청룡정(靑龍亭), 읍배당(揖拜堂) 등이 있었으며, 아랫대 4터로는 일가정(一可亭), 흥무정(興武亭), 취운정(翠雲亭), 석호정(石虎亭) 등이 있었다.
이들 사정터는 갑오경장 때 잠시 폐쇄되었는데, 1899년 고종이 경희궁 안에 황학정을 만든 이후로 황룡정, 석호정 등의 주변 활터가 점차 복원되어 갔다. 장안편사놀이가 행해지는 황학정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서촌의 등과정(登科亭) 옛 터로 옮겨오게 된다.
1932년 5월 22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에 의하면, 300여 년 전부터 시작된 성내와 성외 연합의 시사(矢射)대회는 61년 전(1871년, 고종 8)에 중단되었다가 석호정, 황학정, 일가정, 청룡정, 서호정, 화수정 등 모두 여섯 사정의 유지가 모여 대회를 열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 기사에서는 21일 오전 9시부터 성내 편으로 석호정, 황학정, 일가정의 사원(射員) 30여 명과 성외 편으로 청룡정, 서호정, 화수정의 사원 30명이 사직공원 안에 있는 황학정에서 오후 1시 30분까지 경기를 펼쳤다고 한다.
1990년 11월 14일 제6회 장안편사대중회를 마치고, 1994년 서울 6백년의 기념행사로서 황학정에서 장안편사놀이를 재현한 후, 그 역사와 가치가 인정되어 2000년 4월 20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놀이는 성내와 성외 구역으로 나뉘어 활쏘기 경기를 하는 방식이다. 놀이를 위한 활터에는 획관(獲官, 채점자), 획창한량(獲唱閑良, 창자), 거기한량(擧旗閑良, 기수), 장족한량(獐足閑良, 과녁관리자), 사원(射員, 궁수)이 역할을 맡게 된다.
먼저, 본부 진행자가 “각 터 획관, 획창, 거기, 장족 들어오시오”라고 하면 일제히 들어와서 자기 위치에 선다. 두 번째로 “거기 나가시오”라고 하면, 기를 든 사람이 자기 자리로 달려가서 깃발을 세 번 흔든다.
세 번째로 우두머리 사원(수띠라고 함)들이 활터에 올라가서 벌려서 서고 “정순(正巡) 간다”라고 하면, 거기가 기를 흔들어 응답하고는 기를 내리는데, 사원들이 초순, 재순, 삼순에 걸쳐 세 번 활을 쏜다.
네 번째로 각 활터의 사원이 나와서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히면, 획창이 “아무개가 변”이라고 소리치는데, 획관은 이를 받아서 사원 성명 아래에 변(邊) 자를 쓰는 형태로 점수를 매기게 된다. 이렇게 과녁을 맞히게 되면, 큰 머리에 남치마를 입은 기생 2∼4명이 “아무개 서방님 일시(壹矢)에 관중(貫中)이오”라고 소리 지르고 나서, 곧 바로 “지화자 좋네∼”라는 민요를 부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