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애산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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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가
유적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仁王山) 필운대 부근에 있었던 조선후기 가객 박효관 관련 주택. 민가.
이칭
이칭
필운산방(弼雲山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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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仁王山) 필운대 부근에 있었던 조선후기 가객 박효관 관련 주택. 민가.
내용

박효관(朴孝寬, 1800년∼미상)의 자는 경화(景華), 호는 운애(雲崖). 젊었을 때 수군(守軍) 직함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오군영 소속 세악수 출신 가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집은 필운대 근방 호림원(好林院)에 있었으며, 여기에 ‘운애산방(雲崖山房)’을 열고 가반(歌伴)을 조직하여 풍류방을 운영했다. 운애산방에는 많은 남녀 가객들이 풍류 모임을 열거나 노래를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가객으로서의 명성 때문에 당시 여항 음악인들은 그를 존경해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또한 운애산방에 한양의 영향력 있는 권세가와 시인·묵객들을 모아 ‘노인계(老人稧)’와 ‘승평계(昇平稧)’ 등 계회를 조직하여 풍류를 즐겼는데, 그가 곧 실질적 맹주(盟主)였다. 이런 박효관의 가객 활동에서 가장 큰 좌상객(座上客)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그의 큰아들 이재면(李載冕)이었다. 박효관은 제자 안민영을 비롯한 여러 음악예능인들로 조직된 당대 일류 가반을 이끌면서 ‘운애산방’은 물론, 운현궁과 이재면의 처소인 태양관, 대원군의 별장인 삼계동 석파정, 공덕리 아소당 등을 중심으로 가곡 풍류를 영위했다.

박효관이 가곡사에 남긴 큰 족적은 정음 의식의 발로에서 제자 안민영과 함께 당대 가곡을 수집·정리하여 편찬한 『가곡원류』(1872)에 놓인다. 흔히 『가곡원류』의 편찬에는 흥선대원군이 인왕산 아래 만리장성집을 사용할 수 있도록 후원해주었다는 사실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만리장성집은 여항시인의 모임인 칠송정시사를 위해 후원한 것이며, 여기에 박효관과 안민영이 가객으로 드나든 것이므로, 『가곡원류』 편찬의 출발점이 만리장성집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완성 및 후속 재편찬 등은 모두 ‘운애산방’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온당하다. 박효관에게는 고상한 분재 취미도 있었던 모양인데, 매화를 노래한 시조로 유명한 안민영의 〈매화사〉 8절도 박효관이 운애산방에서 키우던 분재 매화를 보고 지은 것이다. 19세기 후반 가곡은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세련된 성악장르로 거듭나기 위한 치열한 자기 연마의 길에 들어섰고, 박효관의 운애산방은 19세기 중·후반 가곡예술의 마지막 보루로 기능했다.

현황

2016년 현재, 수려했던 필운대와 풍류 가득했던 운애산방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필운동 배화여고 별관 뒤뜰 암벽에 새겨진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 석 자와 이유원이 주도한 필운대 정비(1873년)에 감동관(監董官)으로 참여했던 ‘박효관(朴孝寬)’의 이름 석 자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금옥총부』(안민영, 1885)
「『금옥총부』를 통해 본 ‘운애산방’의 풍류세계」(성무경, 『반교어문연구』 13, 반교어문학회, 2001)
「안민영과 기녀」(신경숙, 『민족문화』 10, 한성대 민족문화연구소, 1999)
집필자
성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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