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회복사은가 ()

고전시가
작품
1638년경에 강복중(姜復中)이 지은 가문가사.
이칭
이칭
선산회복가(先山恢復歌), 사은가(謝恩歌)
정의
1638년경에 강복중(姜復中)이 지은 가문가사.
구성 및 형식

4음보 1행의 가사체를 기준으로 130여 행 내외이고, 서사(10행)·본사(100여행)·결사(20행) 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사본 가집 『청계망사유사가사(淸溪妄士遺事歌詞)』(세로 28.5 cm, 가로 19.5cm)에 수록되어 있고, 파손된 부분이 3군데쯤 있다. 이 작품은 〈선산회복가(先山恢復歌)〉 〈사은가(謝恩歌)〉 등의 별칭으로 전해오고 있다.

내용

청계(淸溪) 강복중(1563∼1639)이 16세의 어린 시절부터 선산의 명당자리를 두고 일어난 투장(偸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송사(訟事)에 응한 후, 60여 년이 지나 팔순을 바라보는 날까지 선산 문제로 다투던 모습과 충청감사의 판결과 중재로 선산을 회복한 후의 기쁨 및 감사의 은혜에 감사함을 읊은 가사이다.

서사인 제1단락(갈마산葛麻山은 전성시全盛時에∼낙유여樂有餘 ᄲᅮᆫ일러니)에서는 고향인 충청도 논산 가야곡면의 아름다운 자연과 자신의 고조(高祖)인 중화재(中和齋) 강응정(姜應貞)의 효행과 관련된 호랑이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다. 본사인 제2단락(당금當今에 敗散패산키는∼어드러로 가돗던고)에서는 가문 내 형제들 사이의 부질없는 싸움으로 송사에 휘말려 옥중에서 고생하고 고향을 떠나 40여 년을 지냈는데 고향 갈마산 부락에서는 사리에 맞지 않는 여론으로 난리를 일으켜서 선현의 유적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제3단락(창천蒼天도 이ᄯᅳᆮ 아라 ∼태평太平케 아니ᄒᆞ라)에서는 친척이 스스로 지은 죄와 정유왜란(1597년) 즈음에 어려움을 당하여 1602년이 되어서 작가가 선산을 수호하고 봉제사(奉祭祀)를 하자고 하였더니 도리어 작가를 모함하여 집에 불을 질렀어도 인과응보로 하늘이 처벌하여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였는데, 1635년쯤에 선산의 명당자리에 몰래 묘소를 씀으로써 관청에 출입을 8개월이나 하면서 뛰어난 목민관을 통해 송사와 투장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있다. 제 4단락(백년百年을 다 ᄉᆞᄅᆞ사 ~ 날 갓ᄐᆞᆫ 이 ᄯᅩ 인ᄂᆞᆫ가)에서는 나이가 72세가 되어서도 송사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여 원만히 해결이 되는 듯하였으나, 사촌 아우의 방해로 추국(推鞫)하는 과정에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한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결사인 제5단락(창천蒼天만 바ᄅᆞ며 ~ 이ᄂᆞ 긔ᄂᆞ ᄃᆞ르랴)에서는 충과 효를 겸한 충청감사로부터 선산을 회복하라는 판결문을 받아들고 기뻐하며 감격해하는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 충청도 감사인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명쾌한 판단으로 선산을 회복하고 기쁨과 고마움에 감사를 표시하며 창작한 가사이다.

의의와 평가

조상의 선산을 둘러싸고 일어난 소송 문제를 주제로 하여 충청도 감사 이안눌의 명쾌한 판단에 기쁨과 고마움을 표하며 창작한 가사이다. 17세기 가문의 선산 회복을 도와준 은인에게 감사하며 가문의 소송과 그 과정을 기술한 가문가사로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17세기 가사 전집』(강전섭, 교학연구사, 1987)
「청계 강복중 시조 연구」(백순철, 『한국시가연구』 12, 2002)
「청계가사 중의 단가에 대하여」(강전섭, 『어문학』 19, 1968)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