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오룡리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굴식돌방무덤 · 회곽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굴식돌방무덤 · 회곽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1999년 군산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1기의 횡혈식 석실분과 2기의 회곽묘 등 모두 3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은 일제강점기 때 도굴의 피해를 입은 뒤 오랜 기간 동안 경작활동과 고분 벽석의 반출로 유구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조선시대 회곽묘는 유구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였지만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역사적 변천

통일신라 시대 횡혈식 석실분이 축조된 이후 조선시대에 회곽묘가 조영되었다.

내용

1998년 군산대학교 박물관 자체 지표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 '말무덤'으로 불리는 한 기의 봉토분이 발견되어 그 성격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학술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봉토분은 자연생토면을 말각 장방형으로 파내어 묘광을 마련하고 그 안에 벽석의 3단까지만 지하에 묻히도록 만들어진 횡혈식 석실분이다. 석실은 그 평면형태가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벽석은 3단까지 수직으로 쌓고 그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내경되게 올려 놓았다. 벽석은 방형 혹은 장방형의 할석을 가지고 가로와 모로쌓기 방식을 혼용하여 축조되었고, 네 벽이 서로 맞물리도록 쌓았다. 벽석과 벽석 사이에는 작은 할석편을 가지고 메꾸었고, 벽석 위에 점성이 강한 점토를 발랐다. 그리고 벽석의 외부에는 벽석의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기다란 할석을 모로놓기 방식으로 더 올려 놓았다. 벽석의 상단부가 유실되어 고분의 구조는 단정할 수 없지만, 네 벽석이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내경시켜 한 매의 천정석으로 덮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실의 내부에는 동벽과 남벽에 붙여진 상태로 시상대가 마련되었는데, 시상대는 추가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1차 시상에서 끝난 것으로 판단된다. 석실과 시상대의 바닥면에는 작은 판석형 천석을 가지고 정연하게 깔고나서 그 사이를 점토로 발랐다.

석실의 남벽 중앙에 마련된 연도는 석실과 동일하게 벽석이 축조되었고, 그 입구에는 문비석처럼 생긴 한 매의 대형 판석을 세워 놓았다. 봉분은 그 평면형태가 거의 원형으로 가장자리에 호석이 돌려져 있으며, 남쪽 중앙에 한 매의 대형 판석이 놓여 있다. 유구의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평행되게 남북으로 두었다. 석실 내부 교란된 흙 속에서 유개합의 뚜껑편과 청동제 대단금구, 귀꽂이가 수습되어, 봉토분이 통일신라시대 고분으로 밝혀졌다.

특징

전북을 동부 산간지대와 서부 평양지대로 갈라놓는 금남정맥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하단부에 자리한다. 진안고원 서쪽 관문이자 금남정맥의 큰 고갯길인 보룡고개와 인접되어 당시 교통의 중심지와 전략상 요충지로서 진안고원의 중요성을 입증해 주었다.

의의와 평가

전북 동부지역 통일신라시대 묘제와 함께 백제 멸망 이후 격변기에 처해 있었던 7세기 말엽 진안고원의 역사성을 밝히는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 2기의 회곽묘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그 축조시기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유구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선시대 회곽묘 연구에 값진 자료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진안 오룡리 고분군』(군산대학교 박물관, 2001)
집필자
곽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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