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고보 동맹휴교투쟁 ( )

근대사
사건
1928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동맹휴교 투쟁.
정의
1928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동맹휴교 투쟁.
개설

대구고보동맹휴교투쟁(大邱高普同盟休校鬪爭)의 연원은 1926년 9월부터 개최된 교내의 사상 강좌회에서 비롯된다. 1927년 12월 사상 강좌회는 비밀결사 조직 형태의 신우동맹(新友同盟)으로 개편되고, 신우동맹은 다시 혁우동맹(革友同盟), 적우동맹(赤友同盟), 일우동맹(一友同盟), 우리동맹 등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구화회(丘火會), 서광회(曙光會) 등의 비밀결사도 함께 조직되었다. 이 비밀결사의 조직에는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북고등학교. 이하 대구고보로 지칭]를 비롯하여 대구농림학교, 대구사범학교, 계성학교, 교남학교 등의 대구 지역 공·사립 중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6·10만세운동 이후 대구 지역 학생운동 조직은 대구고보를 비롯한 대구 지역 중등학교의 연합으로 결성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한국인을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고,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을 한다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 아래 학교는 일제의 한국에 대한 폄하와 왜곡된 인식이 강요되는 민족차별의 현장이었다. 1926년 3월 대구고보에서 일본인 교사가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폄하하자 학생들이 해당 교사의 사직을 요구하는 동맹휴교를 일으켰다. 이에 대구고보가 15명의 학생을 퇴학시키자 학생들은 학교에 퇴학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의 퇴학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맹휴는 성과 없이 학생들이 피해를 입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정치적 운동, 곧 민족운동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대구고보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사회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신간회 대구지회 박광세(朴光世), 장적우(張赤宇), 김점학(金點學) 등을 초빙해 사상 강좌회를 개최하였다. 그 뒤 1927년 12월 대구고보 학생들은 사상 강좌회를 본격적인 학생 비밀결사 조직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신우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미 한 달 전인 11월에 또 다른 대구고보 학생 비밀결사로 구화회가 결성되었다. 신우동맹은 1927년 12월 혁우동맹으로 개편되었다. 혁우동맹은 1928년 2월 구화회와 통합하여 적우동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1928년 4월 적우동맹은 일우동맹과 서광회로 분화되었다.

경과

이처럼 1926년 3월의 동맹휴교 투쟁의 실패를 경험하고 사상 강좌회를 통해 비밀결사 조직으로 전환한 대구고보 학생운동은 1928년 3월 이순신(李舜臣)을 적으로 규정한 일본인 교사의 발언을 계기로 동맹휴교 투쟁으로 연결되었다. 1928년 3월 일본인 교사가 일본 역사 강의 시간에 이순신을 ‘적’이라고 말하였다. 이를 듣고 있던 학생들이 ‘이순신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충신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하여 적이라고 하느냐’는 반문을 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학교측은 반문에 관련된 학생을 강제로 전학시켰다.

학교측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적우동맹은 ‘대구고보 폭압정책 반대동맹’을 결성하여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내부 의견 충돌로 인해 반대동맹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뒤 대구고보 학생들은 여름방학에 동맹휴교 투쟁을 계획하였다. 1928년 9월 26일 2, 3학년 200여 명의 명의로 하야카제(早風) 교장에게 학생들의 요구 조건을 담은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요구 조건은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조선인 본위의 교육실시, 민족 차별 철폐 등으로 요약되었다. 이러한 요구 조건이 수용되지 않자 학생들은 동맹휴교 투쟁을 전개하였다. 학교 당국은 관련 학생들을 정학, 퇴학 등의 조치를 취했다. 182명이 무기정학 처리되고, 비밀결사 회원이었던 박상점(朴相點)·김일식(金一植) 등을 비롯한 18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같은 해 10월에 대구고보 학생들은 맹휴투쟁지도부를 만들고, 지도부 아래 동원부, 선전부, 정찰부, 감시계(교내·교외), 학교계, 선생계, 정차장계 등을 두어 동맹휴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하였다. 맹휴투쟁지도부는 2차 동맹휴교 투쟁을 대구 지역 나아가 전국으로 확대시킬 계획이었다.

결과

대구고보의 동맹휴교 투쟁은 대구 지역 학생 비밀결사 조직이 발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8년 11월 관련 학생 105명이 대구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었는데, 대구고보를 비롯하여 대구공립중학교·대구농림학교·계성학교 등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이 가운데 29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24명이 「치안유지법」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장적우 등이 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배후를 밝힌다는 명목으로 대구 지역 사회운동 세력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고보의 동맹휴교 투쟁은 학교 내 민족 차별을 타파하고, 나아가 사회 전체의 구조적 민족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민족운동이었다. 대구고보 동맹휴교 투쟁은 1930년대에 들어 대구 지역 사회운동 세력과 연계한 반제(反帝) 학생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학생운동을 통해 배출된 운동가들은 기성 운동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참고문헌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부, 1934)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29년 형공 제737 내지 740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편, 창작과 비평사, 1995)
『경북중고등학교 70년사』(경북중고등학교70년사편찬위원회, 1986)
「1920년대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대구고보를 중심으로-」(김일수, 『한국근현대사연구』 2002년 여름호 제21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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