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조선노동동맹회 ()

근대사
단체
1922년 11월 도쿄[東京]에서 창립된 최초의 한인 노동운동 단체.
이칭
이칭
도쿄조선노동동맹회
정의
1922년 11월 도쿄[東京]에서 창립된 최초의 한인 노동운동 단체.
설립목적

동경조선노동동맹회(東京朝鮮勞動同盟會)는 조선 노동운동을 국제적으로 진출시켜 세계 무산계급의 절대 승리를 기하고, 재일 조선 노동자의 계급의식의 촉진과 직업의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22년 여름에 신에츠[信越]전력발전소 공사장에서 일어난 한인 노동자 학살 사건에 분격한 재일 한인 지식인들은 노동조합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11월에 손영극(孫永極), 이헌(李憲), 최갑춘(崔甲春), 백무(白武) 등이 도쿄에서 동경조선노동동맹회를 설립하였다. 상기 인물 외에도 김종범(金鍾範), 마명(馬鳴), 강철(姜徹), 김상호(金相鎬), 손봉원(孫奉元), 김천해(金天海) 등도 실행위원으로서 활약했다.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는 그들의 법률고문을 맡아서 협조하였다. 사무실은 도쿄 요도바시[淀橋]정 츠노하즈[角筈] 725에 있었다. 한편 동경조선노동동맹회는 같은 시기 도쿄의 유학생 출신자들이 설립한 사회사상 단체 북성회(北星會)와 주요 멤버가 중복된다. 즉 동경조선노동동맹회는 북성회의 실천 운동을 하는 노동운동 단체라고도 할 수 있다.

동경조선노동동맹회는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과 일본의 노동운동 연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3년에는 관동대지진 발생으로 운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1924년에는 1월에 기관지 『노동동맹』(발행인 이헌)을 창간하고, 3월에 대지진에 학살된 한인 희생자의 추도회를 공동개최하였다. 5월에는 도쿄에서 거행된 노동절 행진에 동경조선노동동맹회의 기치를 들고 참가하여 한인 노동단체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 조선으로부터 구직 도일자가 증가하여 재일 한인 노동자가 증가하자, 이 단체의 중심 인물인 이헌, 백무 등은 일본 각지의 한인 노동단체를 규합하여 전국 규모의 단체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5년 2월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창립되었다. 그 후 동경조선노동동맹회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도쿄지역 산하 단체가 되었다.

기능과 역할

1923년 7월 지바[千葉]현 노다[野田]정에서 개최된 관동노동동맹대회(關東勞動同盟大會)에 최갑춘, 김약수(金若水) 등이 동경조선노동동맹회 대표로 참가하여 당시 서울에서 진행 중이던 경성고무회사 직공의 태업에 대한 성명 표명을 촉구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사망한 일본 노동 운동가 다카오 헤베이[高尾平兵衛]의 사회장에도 동경조선노동동맹회 멤버들이 한인 사회사상 단체 북성회, 흑우회(黑友會)와 함께 참석하였다. 같은 해 여름에는 도쿄의 일화일선회관(日華日鮮會館)에서 대회를 열었으나 경찰에게 해산 당하였다.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 시에 6000명 이상의 한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에 대해, 동경조선노동동맹회는 1924년 3월 16일에 일화일선회관에서 일본노동총동맹과 함께 “진재시 피살 일지선 합동 추도회(震災時被殺日支鮮合同追悼會)”를 주최하여 한인 약 150명, 중국인 30여 명, 일본인 200명이 모여 피 학살자를 추도하는 모임을 가졌다. 1924년 5월1일 도쿄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에서는 동경조선노동동맹회의 기치를 들고 행진하였다. 1925년 1월 『동아일보』가 논설 「민족 경론」에서 조선의 자치를 위한 참정권 획득을 주장하자, 같은 해 2월 20일 동경조선노동동맹회를 포함한 재일 한인 11개 단체(총대표 이헌)가 연대하여 『동아일보』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동경조선노동동맹회 중심 인물인 이헌, 백무 등은 일본 각지의 한인 노동단체와 연락을 취하여 전국 규모의 한인 노동단체를 설립할 필요성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1925년 2월에 재일 한인 노동단체의 대표격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창립되는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하였다. 3월1일에는 일화일선회관에서 북성회, 학우회, 무산청년회, 형설회, 여자흥학회와 함께 재일 한인 120여명이 참석한 “3·1운동기념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경조선노동동맹회는 창립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과 일본의 노동운동 연대를 추구하는 한편, 재일 한인 노동자의 생존권 옹호, 민족의식 고양 등을 위해 앞장섰던 단체였다. 1924년에 실시한 관동대지진 시의 한인 대학살 희생자들의 추도회 공동 개최와 “조선 자치론”의 사설을 실은 『동아일보』에 대한 배척 운동, 그리고 1925년에 실시된 3·1운동 기념 연설회 공동 개최 등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또한 1925년에는 일본 전체의 한인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창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재일 한인의 노동운동을 한 차원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在京朝鮮人狀況」(朝鮮總督府警務局東京出張員, 1924. 5); 『在日朝鮮人資料集成』 第1券(朴慶植編, 東京: 三一書房, 1975)
「大正十四年中における在留朝鮮人の状況」(內務省 警保局保安課, 1925. 12); 『在日朝鮮人資料集成』 第2券(朴慶植編, 三一書房, 1975)
『在日朝鮮人運動史 –8.15解放前』(朴慶植, 三一書房, 1979)
집필자
김광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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