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후반 중국의 북경·상해·광주·무한·남경 등지에서 흥사단, 의열단, 창조파 등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단합하여 유일당촉성회와 유일당촉성회 연합회를 조직한 후 민족운동의 구심적 기관으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 하였다.
1920년대 초반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분열,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로 인한 임시정부의 변혁 실패,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등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민족역량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한 구심적 기관으로 임시정부가 아닌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원세훈(元世勳)과 신숙(申肅) 등의 창조파(創造派)는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제1회 국민위원회에서 임시정부의 창조가 어려워지자 코민테른의 꼬르뷰로와 협의하여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마련하고, 1924년 6월 북경에서 한국독립당 조직안을 공포하였다. 창조파는 1925년 북경에서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를 조직하고 『도보(앞잡이)』를 발간하여 민족유일당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안창호(安昌浩)가 이끄는 흥사단을 중심으로 한 개조파(改造派)는 1924년 상해파 고려공산당계와 상해청년동맹을 결성하고 민족의 대동단결과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촉구하였다. 마침 1925년 조직된 조선공산당도 1926년 전반기 ‘국민당’ 결성을 결의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6년 중반 안창호가 북경에 와서 창조파의 원세훈 등과 협의하여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1926년 10월 16일 북경에서 창조파와 흥사단 계통의 인물이 중심이 되어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다. 1927년 3월 21일(혹은 4월 11일) 상해에서 임시정부 유지파를 비롯한 민족주의계 인물과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7년 5월 8일 광주에서 대독립당조직광동촉성회, 7월 무한에서 한국유일독립당무한촉성회, 9월 한국유일독립당남경촉성회가 조직되었다. 이어 1927년 11월 9일 상해에는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조직되었다.
1928년 이후 사회주의세력의 전술 변화에 따른 이탈로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결국 1929년 10월 26일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해체되었고, 상해의 사회주의자들은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설립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상해의 민족주의자들은 1930년 1월 25일 별도로 한국독립당을 창립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 중국 관내에서 민족운동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단합하여 민족유일당을 조직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