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군 수암면 3·1운동 ( )

근대사
사건
1919년 3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비석거리에서 2천여 명의 면민이 벌인 독립 만세 시위운동.
정의
1919년 3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비석거리에서 2천여 명의 면민이 벌인 독립 만세 시위운동.
역사적 배경

서울의 3·1운동은 시흥군에도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월 7일 시흥군 영등포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3월 하순에는 외곽 농촌 지역 농민들에게로 파급되었다. 북면(3월 23일), 신동면(3월 25일), 서이면(3월 27일), 서면(3월 27~29일), 과천면(3월 29~30일), 군자면(3월 29일) 등지에서 자발적인 만세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경과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에서는 18개 마을 이장들 앞으로 다음날 비석거리(碑立洞)로 모이라는 통문이 전달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윤병소(尹秉昭)는 동리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3월 30일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와리(瓦里) 홍순칠(洪淳七)은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며 하인들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이리하여 3월 30일 동리민 약 2000여 명이 비석거리에 모여 향교, 면사무소, 보통학교를 돌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수암리의 이봉문(李奉文)은 이날 밤, 만세 시위에 소극적이었던 구장 집에 주민들을 이끌고 가서 항의하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 만세 시위는 18개 리 주민 2000여 명이 참여한, 시흥 군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만세 시위였다. 이 시기에 3·1운동은 가장 광범위하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시흥군에서도 전국적인 독립 만세 시위 상황에 부합되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며 소작인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이 나타났다는 점도 특징이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3·1운동재판기록)(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시흥지방 삼일운동 연구」(이정선, 국민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 석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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