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은 1919년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수입되었는데, 값이 싸고 내구성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편하게 신을 수 있고 모양도 좋아서 급격하게 한국 사회에 보급되었다. 급증하는 수요에 자극되어 한국내에서도 고무신제조 공장들이 1920년대부터 우후죽순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조선고무공업소도 그런 공장들 중 하나였다. 설립자 박영근은 1910년대 초부터 창영상점(昌永商店)을 경영하여 무역업에 종사한 인물로, 남대문 금융조합 설립에 관계하고 뒤에 조합장을 지냈다.
조선고무공업소의 설립 당시 자본금은 3만 원이었고, 회사는 경성부 봉래정 1정목(丁目) 88에 있었다. 직공은 여공을 중심으로 70여 명 수준으로, 당시 서울의 고무신 제조 공장 중에는 큰 기업에 속하였다. 초창기 경영은 급증하는 수요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성장하였다. 생산 규모는 1923년 현재 15만 컬레[足], 6만 원 수준이었으나, 1920년대 말에는 고무신 외에 다양한 고무 제품에 이르기까지 생산이 확장되었고, 생산액은 22만 원에 이르렀다. 특히 대량 생산한 고무신을 창영상점을 통해 판매함으로써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박영근은 1920년대에 이미 고무신 업계의 패왕으로 불리었고, 이를 바탕으로 경성상공회의소 부회두[부회장] 등 경성 상계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전시경제 구축의 기운이 높아지던 1936년, 조선고무공업소는 일본인 자본을 끌어들여 ‘합자회사 조선고무공업소’로 재설립되었다. 자본금은 12만5000원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고무공업은 전시체제기에 접어들어 가장 강력한 통합이 이루어진 업종이었다. 원료 구입과 배급, 생산 할당이 이루어졌으며, 통제 단체로 조선고무공업조합연합회가 조직되었는데, 박영근은 산하 경성고무조합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이후에 동 연합회 이사장도 역임하였다. 그 덕분이었는지 몰라도 조선고무공업소는 통합의 대상이 되지 않고, 태평양전쟁기까지 존속하였다.
일제시기 한국인 자본이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 공업 분야인 고무신 제조업에서 제1세대 공장이자, 서울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산업사적 측면에서 주목할 대상이다. 또한 경영실태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아쉬움이 있지만, 박영근이라는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한 한국인 자본가의 자본축적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