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철광개발주식회사 ()

근대사
단체
1939년 동양 최대 철광산으로 알려진 무산광산(茂山鑛山)의 개발을 위해 일본제철과 미쓰비시광업이 합작하여 설립한 회사.
정의
1939년 동양 최대 철광산으로 알려진 무산광산(茂山鑛山)의 개발을 위해 일본제철과 미쓰비시광업이 합작하여 설립한 회사.
개설

무산광산은 1913년 무산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발견하여 광구 출원을 하였다고 전해지며, 동양 최대의 노천 철광산 중 하나로 알려졌다. 1917년 미쓰비시가 매수하였으나 1930년대 이전까지는 산출되는 철광석의 철분 함유율이 37~40%에 불과한 빈광이어서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 경제 호황으로 철강 수요가 급증했다. 게다가 제강용 고철의 최대 수입국이었던 미국의 대일본 수출 여력이 감퇴하면서 고철과 선철 수입을 통해 강재를 생산하는 일본 제철업의 구조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또한 일본의 만주 침략 이후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던 정치 군사적 긴장감과 블록경제화 경향은 기간산업인 철강 재생산구조의 일본 제국 내 자립의 당위성에 힘을 실었다. 이에 일본정부는 빈광이기는 하지만 노천광산이고 거대한 매장량을 가지고 있었던 무산철광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립목적

무산철광개발주식회사의 설립목적은 무산광산을 개발하여 생산된 철광석을 일본 제국 내 제철소에 공급하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공업화’의 상징으로 총력을 기울여 건설을 추진한 청진제철소에 철광석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 본격적 개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미국과 소련에 대항하여 일본과 조선, 만주를 아우르는 ‘일본해 중심 발전론’을 주창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조선의 적극적인 산업 개발이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 신흥재벌 닛지쓰(日窒)를 끌어들여 개발한 장진강 수력발전소 생산 전력의 소비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우가키의 구상은 무산광산 개발을 기반으로 청진에 대규모 선강일관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구상은 일본 내 기존 제철소와 무산광산 개발을 연결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구상과 일정한 마찰을 빚으면서 의견 조정에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무산철광개발주식회사의 설립과 청진제철소의 건설로 현실화되었다.

기능과 역할

설립 당시 자본금은 5000만 원으로 50%인 2500만 원이 불입되었다. 무산광산의 원 소유주인 미쓰비시광업과 여기서 생산된 철광석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일본제철이 대략 절반씩 출자하였다. 본사는 일본 도쿄에 두고 경성부 황금정 1정목 180-2(현재의 서울 을지로)에 지점을 두었다. 대표는 히라오 하치사부로(平生釟三郞)이었다.

미쓰비시와 일본제철의 합작에 의한 본격적 광산 개발을 통해 철광석 생산의 양적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빈광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선광(選鑛)시설의 대대적 확충도 이루어졌다. 계획된 시설 확충이 대체적으로 완료된 1942년 이후부터 연간 100만 톤 정도의 철광석을 생산하여 제국 내 주요 제철소에 공급하였다. 특히 1942년부터 가동에 들어간 청진제철소는 필요한 철광석의 80%를 무산광산에서 공급받았다.

의의와 평가

무산철광개발주식회사는 일제시기 철광산 개발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제국 내 철강자립 정책의 추진,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그 개발 과정을 통해 일본제국내 각 경제 행위 주체들, 즉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군부, 민간기업(미쓰비시, 일본제철) 간의 의견 불일치와 이를 통해 나타난 정책적 시행착오, 국책과 영리의 대립, 그리고 전체 엔블록 경제력의 한계, 식민지 권력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보기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日本製鐵株式會社史 1934~1950』(日本製鐵株式會社史編纂委員會, 1959)
「조선 제철업 육성을 둘러싼 정책조율과정과 청진제철소 건설(1935~45)」(배석만, 『동방학지』 151, 연세대 국학연구원, 2010)
집필자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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