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업협회 ()

근대사
단체
1925년 다가와 쓰네지로(田川常次郞)의 주도로 설립된 제조업자 중심의 경제 단체.
정의
1925년 다가와 쓰네지로(田川常次郞)의 주도로 설립된 제조업자 중심의 경제 단체.
설립목적

조선공업협회는 공업 발전과 제조업자의 친목·단결을 위한 제반 활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공업 관련 각종 정보 교환, 조사, 여론 조성, 당국 청원 등이었다. 설립 후 전국공업자대회 개최, 상공회의소 주최의 산업 개발 간담회 참석, 전기료 인하 운동, 견직물 및 면직물에 대한 이입세 철폐 반대 운동, 공업금융에 대한 청원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원 및 변천

철도차량 제작·수리업체인 용산공작주식회사(龍山工作株式會社) 상무이사이자 동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자였던 다가와 쓰네지로(田川常次郞)가 주도하여 설립하였다. 1924년 12월 경성상공회의소에서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이듬해 9월 경성호텔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초대 회장에는 다가와가 선임되었다. 협회 이사 10인, 감사 3인이었으며, 당시 조선제사주식회사(朝鮮製絲株式會社) 이사였던 남정규(南庭圭)·이강견(李康堅) 등 한국인 2명도 이름을 올렸다.

1928년 12월 조선공업자대회를 계기로 당시 이른바 조선 재계의 원로라고 불린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 덴니치 쓰네지로(天日常次郞) 등 일본인 유력인사 10명이 모여 공업 진흥을 위해서 기존 협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협회를 설립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기존 협회를 이끌고 있던 다가와도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1929년 4월 기존 조선공업협회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신설되는 협회에 회원 전부가 무조건적으로 가입할 것을 결의하였다. 신설 공업협회는 조선총독부 인가를 거쳐 사단법인 형태로 1930년 5월 발족하였다. 3월의 총독부 설립인가 단계에서의 명칭은 전선공업협회(全鮮工業協會)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조선공업협회로 변경하여 출범하였다. 조선은행 총재인 가토 게이사부로(加藤敬三郞)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협회 설립을 주도한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와 견직물업계의 유력 한국인 기업가였던 유전(劉銓)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상무이사 5명과 감사 3명을 두었는데, 상무이사는 해산된 기존 협회 회장 다가와를 포함한 일본인 4명과 정미업자이자 경기도회 의원인 한국인 이봉렬(李鳳烈), 감사에는 일본인 2명과 한국인 1명이었다. 감사로 선출된 한국인은 1세대 한국인 자본가로 이미 원로의 반열에 올라있던 백완혁(白完爀)이었다. 평의원은 75명이었는데, 당시 전국의 주요 제조업자가 망라되었으며, 여기에는 경성방직 김연수(金秊洙) 등 한국인 기업가 11명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27명의 상담역과 7명의 고문을 별도로 두었는데, 주로는 정재계 유력 인사들을 추대한 것이었다. 한국인으로는 한상룡(韓相龍)·장직상(張稷相)·박영철(朴榮喆)이 상담역에, 박영효(朴泳孝)가 고문에 추대되었다.

한편 신설 협회에는 조선총독부 식산국장, 상공과장 등도 회원으로 가입하였는데, 협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영향력 행사의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능과 역할

1931년초 조선공업협회는 명실상부한 제조업자의 전국 조직으로 확대․강화되면서 보다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우선 공업 발전을 위한 각종 활동을 보면, 제조업 실태에 대한 각종 조사와 이를 토대로 한 공업 발전을 위한 대책 수립, 관련 간담회 개최를 통한 여론 형성과 당국에 대한 직접적 제안 등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공업자대회(工業者大會), 공업전람회 등을 개최하였고, 실업, 불경기, 빈민구제 등 각종 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조사와 대책도 수립하였다. 1930년대말에는 전시동원에 따라 심각해진 숙련공 부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조선총독부가 수립한 숙련공 양성 정책에 따라 국고 보조를 통한 숙련공 모집과 주요 공장에 대한 위탁교육, 기계공 양성소의 설치와 운영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공업협회는 일제강점기 공업 진흥을 슬로건으로 조직된 제조업자들 최초의 전국적 조직체였다. 1930년대부터는 일제가 정책적으로 추진한 ‘식민지 공업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경제 단체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는 제조업계의 권익을 옹호하는 순수한 민간단체의 성격이 강했으나, 1930년대 초 조직을 확장하여 재출범하면서부터는 조선총독부 경제 정책을 민간 제조업계에 전달하는 관변 경제 단체의 성격도 가지게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는 일제의 국책을 수행하는 관변 단체의 성격이 한층 강화되었다.

참고문헌

『朝鮮工業協會會報』 1(朝鮮工業協會編, 京城: 朝鮮工業協會, 1930)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中村資良編, 京城: 東亞經濟時報社, 1921~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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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즈(www.kinds.or.kr/)
집필자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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