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세계는 우주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능엄경』 권4에, “세(世)는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이고, 계(界)는 방위를 가리킨다. 그대들은 알라. 동·서·남·북과 동남·서남·동북·서북, 상·하를 계(界)라 하고, 과거·현재·미래를 세(世)라 한다.”라고 한데서 '계'를 공간으로 '세'를 시간으로 해석한 출처를 찾아볼 수 있다.
『무량수경』 권 하에서는,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길 무량수불의 위신력은 한계가 없어 시방세계에 무량무변하고 불가사의하여 제불여래가 칭찬하지 않는 분이 없다”라고 하였다. 『삼가귀감(三家龜鑑)』에서는, “또한 원컨대 시방세계의 백성과 영혼들이 모두 사바세계의 고통스러운 곳을 벗어나 함께 서방의 극락국토에 가서 부처를 보고 법을 들어 함께 성각을 얻어지이다[亦願十方世界 人與含靈 咸脫娑婆之苦處 同歸西方之樂邦 見佛聞法 同成正覺].”라는 기원문이 보여, 시주자의 공덕이 시방세계에 두루 미치기를 원하는 서원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는 예불문에서 과거·현재·미래 온 우주에 존재하는 붓다나 보살들을 가리킬 때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수식어이다. 『법원주림(法苑珠林)』에는 붓다에 대한 찬탄에서,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은 분이 없으시네, 시방세계에서도 비할 분이 안계시고, 세계의 모든 것을 다 둘러보아도 일체에 부처님과 같은 분은 없으시네[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世界所有我盡見 一切無有如佛者].”라고 한 대목이 있으며, 다른 예경문에도 이 문장이 자주 인용된다.
법장(法藏)은 『화엄경문의강목』에서, “시방세계는 곧 미진(微塵)이다”라고 하여 시방세계에 가득한 무수한 세계를 뜻하기도 하였다. 시방세계는 또한 시방과 세계로 나뉘어 시방중생, 시방세계, 일체세계, 삼천대천세계 등 다른 수식어와 결합하여 불교문헌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시방세계는 화엄학이 성행한 한국불교에서 의상 법계도(法界圖)의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는 철학적 주제가 선가(禪家)의 일심(一心)과 관련해 자주 화제가 되는 내용이다. 이때 시방세계는 온 우주의 의미를 대변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각운(覺雲)의 『선문염송(禪門拈頌)』에는 화엄의 이론을 인용해, “법계는 법 그대로이며 일체제법이 서로 섞일 수 있어 시방세계가 모두 한 티끌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한 티끌 역시 시방세계에 들어간다”라고 한 대목을 볼 수 있다.
균여(均如)의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에는 화엄의 시방세계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논의가 있다. 상화상(相和尙)이 말하길, “한 미진 가운데 시방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은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라고 한 말에 대해 원사(員師)가 묻길, “미진에 머물지 않는 것을 소(小)라 하고 시방세계에 머물지 않는 것을 대(大)라 합니까?”라고 하였을 때 상화상은, “(대소는) 똑같이 양(量: 생각)일 뿐이다”라고 답하였다. 원사가 다시, “만약 그렇다면 왜 사물에 대해 미진은 작다고 하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합니까?”라고 한 것에 대해 상화상은, “미진과 시방세계는 모두 무자성으로 오직 머무름이 없을 따름이다. 미진을 작다고 말하고, 세계를 크다고 하는 것은 모름지기 십이처의 일일 따름이며 작기 때문에 작다고 하거나, 크기 때문에 크다고 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티끌이 작거나 세계가 크다는 것은 현상계에서 티끌을 작고 세계를 크다고 말하는 것이지 무조건 티끌은 작은 자성을 가지고 있고, 세계는 큰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티끌을 크다 하고, 세계를 작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도리는 나란히 평등하며 머무름 없는 실상을 보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시방세계와 티끌의 주제가 화엄과 선의 관계에서 다루어진 장면을 볼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시방에 대해 전·후·좌·우·전우·전좌·후우·후좌·상·하를 가리켰다고 한다. 『잡아함경』에 “이때 시방세계 대중 가운데 위신력을 지닌 제천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어 초기불교시대부터 시방세계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방세계라는 용어는 이후 모든 불전에서 사용되어 왔고, 한국 불교에서는 화엄과 선의 관계에서 논의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