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은 1970년대 YH무역 노동조합에서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한 노동운동 활동가이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의 폐업 철회와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신민당사 점거 농성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8월 11일 경찰의 폭력적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하였다.
김경숙(金景淑)은 1958년 6월 5일 전라남도 광산군 비아면(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1965년 부친이 사망한 후 1971년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 누에고치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72년 광주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서울로 상경해 양동의 하청 제품 공장, 한품섬유, 태진사업, 이천물산 등에서 봉제 미싱사로 일하였다. 1976년 8월 30일 YH무역주식회사(YH무역)에 입사하였다.
YH무역은 장용호 회장이 자신의 이름인 영문 이니셜로 회사명을 만든 가발 수출업체이다. 김경숙은 1977년 YH무역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78년 YH노동조합 조직부 차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노조 소그룹 차돌이그룹장으로 활동하였다. 1977년 3월부터 1978년 12월에 노조가 설립한 '녹지야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하였으며, 1979년 동일교회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1979년 3월 30일 YH무역이 폐업을 공고하였다. 자본 해외 도피, 횡령, 무리한 사업 확장 등이 폐업의 원인이었다. YH무역 노동조합은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공장 점거 농성에 돌입하여 폐업을 철회하게 하였다. 이때 김경숙은 후생부 책임 담당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YH무역은 1979년 8월 9일 다시 폐업을 단행하였고, YH노조 여성 노동자 187명은 사측의 폐업에 항의하고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점거 농성을 시작하였다. 요구 내용은 폐업 철회, 노동자 생존권 보장 등이었다.
같은 해 8월 11일 새벽 2시 '101호 작전'에 따라 1,200여 명의 경찰기동대가 투입되었고 23분 만에 벽돌, 쇠파이프 등 불법 장구를 사용하여 점거 농성을 강제 해산시켰다. 폭력적인 진압 종료 후에 김경숙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YH노조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귀향시켰으며, 도시산업선교회가 배후 세력이라고 발표하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취업을 못하게 하였다.
8월 13일 경찰은 '신민당사 YH여공농성 사건의 진상'이라는 자료를 통해 김경숙이 진압 부대 투입 30분 전에 손목의 동맥을 끊고 투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2008년 ' 진실 ·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 사망 관련 조작 의혹을 조사하여 김경숙의 왼쪽 손목 상처는 자해 손상이 아니고, 사복조가 투입된 후 폭력을 피하는 과정에서 추락하였으며, 추락 전 후두정부에 치명적인 가격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이 사망 시각, 사망 장소, 사망 원인을 은폐 · 왜곡하는 중대한 조작 행위를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강제 해산은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이 주도한 청와대 회의에서 결정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시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YH노동조합의 점거 운동은 유신체제와 반노동 기업에 대한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을 보여주었으며, 김경숙 사망 사건은 10월 부마항쟁(釜馬抗爭)으로 이어져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속화하였다.
김경숙이 남긴 일기 13권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복원하였으며, 오픈아카이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1년 9월 25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YH노동조합동우회와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공동으로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를 운영하고 있다. 김경숙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