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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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유적
북한 평양직할시에 있었던 고려시대 왕실의 행차가 빈번했던 중요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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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평양직할시에 있었던 고려시대 왕실의 행차가 빈번했던 중요 사찰.
내용

평양에 있는 흥복사(興福寺)는고려 때 왕실의 행차가 잦은 중요한 사찰이었다. 고려 조정은 왕경(王京, 개경)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던 서경(西京, 평양)을 자주 찾았다. 국난 시에는 사찰과 동명신(東明神) 등에 국난 극복을 기원하였고, 왕족과 고위 신료들을 대동하고 평양에 갈 때는 흥복사와 영명사(永明寺) 등을 들르고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였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역대 국왕들의 흥복사 행차를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053년(문종 7) 10월 7일에 왕이 흥복사에 행차했다가 대동강에 나가 누선(樓船)을 타고 상장군(上將軍) 이상의 신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087년(선종 4) 9월 24일에 왕이 흥복사에 행차하였고, 같은 해 10월 17일에도 왕이 흥복사와 금강사(金剛寺)에 행차하였다.”, “1102년(숙종 7) 8월 12일에는 왕이 흥복사와 영명사에 행차하여 향을 올리고, 구제궁(九梯宮)에 가서 영명사 등의 시를 짓고 개경과 서경의 유신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도록 하고는 용선(龍船)을 타고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같은 해 9월 15일에는 흥복사의 시왕당(十王堂)이 완성되어 태자에게 가서 행향(行香)하도록 명하였다. 다음날인 16일 왕과 왕비와 태자와 제왕이 흥복사에 가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해 10월 6일에도 왕은 흥복사에 행차하였다.”, “1109년(예종 4) 4월 11일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허도(許度)를 보내 평양 목멱산(木覓山)의 동명(東明) 신사(神祠)에 제사 지내게 하고, 흥복사 영명사 장경사(長慶寺) 등에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설치하여 여진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를 빌었다. 이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윤관(尹瓘)은 왕릉에 보내 역시 승전을 빌었다.”, “1116년(예종 11) 4월 7일에 금강사와 흥복사에 행차하고, 돌아오는 길에 영명사에 이르러 누선을 타고 제왕(諸王) 재추(宰樞) 신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왕이 지은 선려조(仙呂調)의 「임강선(臨江仙)」 3편을 신료들에게 보여주었다.”, “1120년(예종 15) 8월 29일에 왕이 왕비와 두 공주와 함께 흥복사에 행차하여 강물을 관상하였다.”, “1127년(인종 5) 3월 18일에 왕이 왕비와 두 공주와 함께 흥복사에 행차하였다가 재추와 및 근신들과 대동강 중류에서 누선(樓船)을 타고 뱃놀이를 하며 놀았다.”, “1168년(의종 22)에 왕이 흥복사에 행차하고 나서 남포(南浦)에 용선(龍船)을 띄우고 재추와 근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등이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흥복사가 “평양부 남쪽 백 보 거리에 있다”고 적고 있어 16세기까지도 이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한국사찰사전』(홍사성, 이화문화출판사, 1994)
『북한사찰연구』(사찰문화연구원, 사찰문화연구원 출판부, 1993)
『한국사찰전서』(권상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집필자
정병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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