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직된 친일 미술단체이다. 1941년 2월 경성에서 활동하던 미술가 20여 명이 창립한 경성미술가협회의 후신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을 토대로 조선총독부 관료, 조선인 미술가, 재조선 일본인 미술가를 망라하여 결성된 반관반민 단체이다.
국가의 비상시국에 직면하여 신체제 아래서 일억일심(一億一心)으로 미술가 일동도 궐기하여 서로 단결하고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하여 직역봉공(職域奉公)을 다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일제는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출범시켰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전쟁을 위해 경제, 산업, 문화 등 조선의 각 부문을 통합하여 일원적 체제로 정비하였고, 1941년 1월 미술과 전시를 담당하는 문화부를 설치하고 2월 조선총독부 관료, 조선인 미술가, 재조선 일본인 미술가를 망라한 경성미술가협회를 출범시켰다. 경성미술가협회는 같은 해 3월 조선미술가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1년 2월 결성식 당시 회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인 시오하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 고문은 총력연맹 문화부장 야나베 에이자부로[矢鍋永三郞]였고 이사장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으로, 조선미술가협회는 일제가 정책적으로 미술가들을 동원하기 위해 조직한 반관반민 단체의 성격을 띠었다. 1부 동양화, 2부 서양화, 3부 조각, 4부 공예로 구성되었고 회원수는 150여 명이었다. 조선인 회원으로는 동양화부 이영일‧이상범‧김은호, 서양화부 심형구‧김인승‧이종구‧배운성‧장발, 조각부 김경승 등이 있었다.
1943년 1월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 산하단체로 가맹하였고, 같은 해 3월 총회를 열어 일본의 성지 순례, 병사 위문 만화가 파견, 보도와 생산미술 중심의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 개최, 시국강연회와 좌담회 개최 등을 신규 사업으로 결정한 뒤 그 일환으로 5월에 ‘생산현지미술보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43년 총회 당시 회원 수는 240여 명으로 확인된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3회에 걸쳐 ‘반도총후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조선미술가협회는 ‘반도총후미술전람회’ 개최, ‘결전미술전람회’ 후원 등을 통해 전시체제가 강화되던 일제강점기 말기 선전선동미술의 주축으로 기능하였다.
1942년 11월 미쓰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 및 조지야백화점(丁字屋百貨店) 화랑에서 열린 제1회 ‘반도총후미술전람회’는 “반도의 생생한 총후 생활을 묘사한 미술을 진열하여 민중의 시국인식을 계발 지도하기 위함”을 표방하였다. 모두 292점이 출품된 가운데 87점이 선정되었고, 선정 작품과 함께 초대작가의 작품으로 김기창의 〈폐품회수반〉, 김인승의 〈전선의 화(華)〉, 심형구의 〈동아(東亞)를 지킴〉, 그리고 위원작가의 작품으로 이상범의 〈천고마비(天高馬肥)〉, 김은호의 〈방공훈련〉이 전시되었다. 1943년 11월 제2회 ‘징병제기념 반도총후미술전’ 전람회는 총후 국민의 정신을 높이기 위한 것과 징병제 실시에 관한 것 두 가지를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밖에도 ‘대동아전쟁3주년 기념 전의양양 및 근로예찬 가두전시’(1944년 11월), ‘제40주년 해군기념일 기념 가두 이동전람회’(1945년 5월) 등을 개최하였다. 이들 전람회는 미술에 소양이 없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전쟁 의식을 고양하고 황국신민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