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서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한국현대작가초대전’(1959~1968), ‘악뛰엘전’(1964) 등에 참가하며 한국 추상미술운동을 주도하였고, 동양적인 주제와 새로운 기법을 탐구하여 독자적인 양식의 〈적멸(寂滅)〉 연작을 발표하였다.
1934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광주사범고등학교 미술교사 겸 서양화가 강용운(1921~2006)과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교수 박영선의 영향으로 추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부터 조선일보사 주최 ‘한국현대작가초대전’(1959~1968)에 참여하면서 화단에서 입지를 다졌다. 1962년 서라벌예술대학(현재의 중앙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64년에는 앵포르멜 화풍을 추구하는 ‘악뛰엘’에 가담하였다. 1962년 도쿄 ‘국제자유초대전’, 1965년 파리비엔날레, 1967년 상파울루비엔날레, 1970·1975·1977년 카뉴국제회화제, 1975년 인도트리엔날레에 출품하는 등 국제전에도 왕성하게 참여하였다.
1975년에는 국제전 참여를 계기로 유럽 미술을 순례한 뒤 서구 미술을 쫓아가기 바빴던 기존의 태도를 반성하고, 한국적 내면의 세계를 구현하는 미술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청자의 빛깔에 대한 탐구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 연작(19761978), 불교의 적멸 사상을 주제로 깨달음을 얻은 정신의 고요한 상태를 표현한 〈적멸〉 연작(1978타계 무렵)을 완성하였다. 이 시기 ‘앙뎅팡당전’(19741979), ‘서울현대미술제’(19751984), ‘에콜 드 서울’(1975~1982) 등 국내 그룹전을 통해 새로운 추상미술을 발표하였고, 이는 한국 추상미술계에도 자극제가 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는 전통적인 한지를 재료로 평면적인 회화의 한계를 극복한 종이부조 작업으로 새로운 〈적멸〉 연작을 발표하였다. 1982년 일본 교토에서 종이 작업으로 개인전을 열고 ‘현대 종이의 조형전―한국과 일본’(1982~1985)에 참여하며 일본 미술계와 교류하는 등 종이 작업을 중심으로 왕성한 창작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88년 54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타계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인 〈적멸〉 연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유화 작업과 직접 한지를 주조하여 만드는 종이부조 작업으로 나누어진다. 유화 작품들은 기하학적인 모듈의 반복, 가상(假象)의 요철(凹凸)이 느껴지는 착시효과, 스텐실을 비롯한 판화 기법 응용 등의 기법을 통해 깊이 있고 명상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며, 종이부조 작품들은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로 직접 주조한 종이 그 자체를 작품화함으로써 재료의 물성과 동양적인 주제를 결합시키고 있다.
정영렬은 적극적인 국제전 참여를 통해 국내의 보수적인 화단에 변화를 주었고, 광주 지역에 추상미술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앵포르멜, 기하학적 추상, 모노크롬 등 1950년대 말부터 한국화단에 유입된 다양한 추상미술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적인 주제, 소재, 기법에 대한 탐구를 통해 독자적인 추상회화를 완성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8년 문교부 문예상 수상
1972년 목우회 미술교육상 수상
1998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정영렬 10주기 추모전’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