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경전 ()

목차
관련 정보
경주 집경전지 중 비각과 문 정측면
경주 집경전지 중 비각과 문 정측면
유교
제도
조선시대 경주에 있던 태조 진전(眞殿).
정의
조선시대 경주에 있던 태조 진전(眞殿).
개설

집경전(集慶殿)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경주 집경전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세워지고, 국가에서 추인하여 태조 진전으로 기능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태조 어진만 강릉으로 옮겨져 강릉 집경전으로 유지되다가 1631년 화재로 인해 전각과 초상화가 모두 불타 버렸고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내용

조선시대에는 국조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하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경상도 경주에 태조 어진이 국초부터 봉안되어 있었고, 1442년(세종 24)에 전각을 개조하고 태조 어진을 봉안한 후 준원전의 예에 의하여 속절(俗節)에 사신을 보내 제사 지냈다.

임진왜란 때 예안 청량산으로 옮겨 무사하였던 태조 어진을 강원도 강릉에 옮겨 봉안하였다. 이를 역시 집경전으로 불렀다. 1628년(인조 6) 화원 이징(李澄)을 보내 어진을 보수한 후 다시 봉안하였다. 1631년(인조 9)에 강릉 집경전에 화재가 나 어진도 불타 버렸다. 같은 해 가을에 전주 경기전과 영흥 준원전 태조 어진을 모두 살펴본 후 준원전 어진이 한 곳도 손상된 곳이 없다고 하여 이 어진을 이모한 후 다시 강릉 집경전에 봉안하게 하였으나 병자호란으로 이루지 못하였다. 전쟁 후에도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 1796년(정조 20)에는 경주 집경전 터에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 다섯 글자를 세운 비를 세워 태조 진전이 있던 옛 터임을 알리게 하였다.

의의와 평가

집경전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집경전에는 국초부터 태조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고, 세종대에 전각을 개조하고 진전 의례를 시행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각은 소실되고 어진만 강릉으로 옮겨 강릉 집경전으로 유지되다가 1631년 화재로 전각과 어진이 모두 불타 버린 후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 집경전의 역사와 제향 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태조 어진이라는 왕조의 중요한 상징물에 대한 국가적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춘관통고(春官通考)』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19세기 진전 및 어진 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김지영, 『장서각』 26, 2011)
「숙종·영조대 어진 도사와 봉안 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김지영, 『규장각』 27, 2004)
「조선왕조시대에 있어서의 진전의 발달」(조선미, 『고고미술』 165, 1980)
집필자
김지영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