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은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과학자이자 정치가이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지낸 후 학계로 돌아가서 경희대학교 공과 대학 교수, 국제대학(지금의 서경대학교) 학장,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 KAIST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0년 이후에는 한국자유총연맹 이사, 새천년민주당 국정자문위원회 과학정보분과위원장 등을 두루 거치며 한국 과학기술 진흥에 힘썼다.
1925년 9월 22일 전라북도 남원(南原)(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이며 호(號)는 서정(瑞正)이다. 경성대학 예과 이학부를 거쳐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4년부터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응용화학과 교수 및 학과장 등을 지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7년 미국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교(VPI, Virginia Polytechnic Institute and State University) 대학원에서 공학 석사를 취득하고, 1961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여 공학 박사가 되었다. 1967년 4월부터 1971년 6월까지 초대 과학기술처(科學技術處)(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제1기 국회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76년에도 유신정우회 제2기 국회의원으로 유임되었다. 이후 학계로 돌아가서 경희대학교 공과 대학 교수,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학장,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 카이스트(KAIST)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0년 이후에는 한국자유총연맹 이사, 새천년민주당 국정자문위원회 과학정보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2016년 6월 13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1967년 4월 12일에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차관에 이재철, 기획관리실장 이응선 등 과학기술처 중요 간부를 임명하였다. 청사는 구(舊) 원자력청(原子力廳) 자리에 정하였으며, 4월 21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과학기술처 현판식과 시무식을 열었다. 이듬해인 1968년부터 과학기술처는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지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서 김기형은 종래 각 부처에서 산만하게 해 온 과학 기술 행정과 투자 기획을 종합 조정하여 투자의 낭비와 중복을 피하고 효율적이고 강력한 R&D를 추진하며, 과학 기술 인력의 양성과 확보에 힘을 쏟았다. 또한 한국 과학 기술을 선진화하는 장기 계획을 처음으로 제이 차 경제 개발 계획(第二次經濟開發計劃)의 일환으로 수립하였고, 20년 앞을 내다보는 과학 기술 장기 전망도 세웠다. 인구가 많고 국토는 좁지만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은 한국이 부강해지는 지름길이 과학 기술 진흥이라는 신념 아래, 행정 제도와 법령을 정비하였다. 비록 1967년 과학기술처의 예산이 18억 2천만 원에 불과했지만 과학 기술 기금을 설치하여 과학 단체 및 대학의 연구 개발을 지원하게 하였다.
김기형은 다른 관청과 달리 과학기술처가 범국민적인 과학 기술 진흥과 국민 생활 과학화 운동의 구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과의 교류 문호를 개방하여 대학 교수들과도 수시로 장관실에서 만났다. 또한 과학의 생활화를 추진하기 위해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후원회(현, 한국과학창의재단)를 설립하였다. 과학기술처 발족으로 원자력원(原子力院)이 없어지고 원자력청이 새로 탄생되어 성좌경이 초대 청장이 되었는데, 구 원자력원장이자 학계의 원로인 윤일선 박사에 대한 예우를 고려해 김기형은 대통령 친서를 받아 기업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아 5천만 원을 마련하여 과학기술후원회를 세우고 윤일선을 초대 이사장으로 모셨다.
김기형이 장관 재임 중 역점을 둔 사업은 인력 개발 및 양성 사업이었다. 그는 기업이든 연구 개발이든 최고의 인재로부터 최고의 결실이 나온다는 생각 아래 국력 배양과 과학 기술 진흥을 위한 인력 확보와 양성에 주력하였다. 장기 인력 발전 계획을 처음으로 수립하고 인력 수급 추계안도 작성하고 인력개발연구소 운영도 지원하였으며, 기술사 제도의 활용과 활성화에도 힘을 썼다. 그의 노력으로 국민 총생산에서 연구 개발 투자가 자치하는 비중이 1967년 0.7%에서 꾸준히 늘어나게 되었다. 김기형 재임 중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가 준공식을 갖고 성공적인 운영에 돌입하였으며, 과학기술처 산하의 특수 대학원으로 한국과학원이 설립되어 오늘날의 카이스트로 이어졌다.
김기형은 장관을 물러나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으로 복귀했다가 1973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어 경제과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76년 정치계를 떠나 경희대학교 공대 교수 겸 인류사회재건연구원장을 맡았으며, 1982~1984년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의 학장이 되었다. 그리고1987년에는 자신이 설립에 큰 몫을 담당하였던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의 이사장이 되었으며, 1994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부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에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이사장, 21세기 국정자문회의 지식정보분과위원장, 요업(세라믹)기술원(KICET) 운영위원장, 과학기술 앰버서더 대표, 장영실기념사업회 명예 회장 등을 맡아 과학 기술 진흥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에 청조근정훈장을, 1999년에는 제1회 장영실 과학문화대상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