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화(李敏華)
보병 1대대는 본대가 되고 여행단(旅行團)은 후위가 되어, 이범석(李範奭)이 차임(此任)에 당하고 후위첨병(後衛尖兵)은 이민화(李敏華)와 본인이 각각 군인 5명을 대(帶)하였는데, 이민화는 골짜기 본도(本道)의 전방 60도 경사진 산복(山腹)에서, 본인은 오른쪽 90도 벼랑인 고지에서 적이 지나는 것을 기다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달 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접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피하여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에 가서 고려혁명군의 장교가 되었으나, 자유시참변을 겪고 러시아령을 탈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오던 중 1923년 노령(露領)과의 국경지대인 밀산현(密山縣)에서 중국의 토병(土兵)과 맞닥뜨려 교전중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