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수(林翰洙)
1875년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의주부윤과 강원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벌목하는 사실을 알아내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임오군란 후까지 강원도관찰사로 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 이때 청나라의 요청으로 토문강(土門江) 북안의 유민쇄환 조사, 혜산진 이설 등 변방 방비에 힘썼다.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함흥지방의 향권(鄕權) 다툼에 휘말려, 남병사 윤웅렬(尹雄烈)의 죄상을 보고한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 윤웅렬의 아들 윤치호(尹致昊)를 안무사(安撫使)로 파견하고 가도사(假都使)를 차하(差下)하는 등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자, 공무를 그만두고 직접 봉계(封啓)를 올리기 위해 잠행하다가 그 이유로 파직되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