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자양(子讓). 강양(姜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비웅(姜非熊)이고, 아버지는 강희(姜曦)이며, 어머니는 성복동(成福仝)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사관(史官) · 의금부도사를 거쳐, 1496년(연산군 2)에 사헌부지평이 되어 공신들의 가자(加資: 품계나 직위를 올리는 제도)가 외람(畏濫)됨을 지적하는 등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1504년 사간원사간으로 있을 때 사헌부와 함께 임금에게 간언하여 장 숙원(張淑媛)의 이웃집 철거하는 것을 반대하다 화를 당하여 재령으로 장류(杖流)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507년(중종 2)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서용(敍用)되었다가, 재직중에 백성들의 진휼(賑恤)을 소홀히 하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근면하지 못하다는 경기관찰사의 장계에 따라 한때 파직당하였으나,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재서용되었다.
1514년에는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에 의해 추천되어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으며, 그 포상으로 가자되어 당상관에 올라 행호군(行護軍)으로 재직중 죽었다.
성품이 본래 청렴하여 집이 몹시 가난하였으며, 죽은 뒤 염장(殮葬)할 용구조차 갖추지 못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당대에 명필로 그 이름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