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천인이었으나 충숙왕을 섬겨 호군(護軍)이 되었다. 일찍이 낭장(郎將) 백유(白儒)의 처를 강간한 일로 감찰사(監察司)의 탄핵을 받아 장류(杖流)되었다가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기용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1339년의 조적(曺頔)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으며, 다시 양광전라경상삼도문민질고사(楊廣全羅慶尙三道問民疾苦使)가 되어 권세를 이용하여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를 적발하는 등 치적이 있었다.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1347년(충목왕 3)에 왕을 꾀어 사사로운 원한이 있던 조득구(趙得球)를 탐라(耽羅)로 귀양보냈다.
그해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무렵 충목왕의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총애를 받고 영화를 누리고 횡포가 심하였으며,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하고 많은 뇌물을 받았다.
이로 인해 1348년 김윤(金倫) · 이제현(李齊賢) · 박충좌(朴忠佐) 등으로부터 ‘영귀(榮貴)를 탐하여 백 가지로 욕심을 부리어 일대(一代)의 흉악을 저지르는 자’라는 탄핵을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가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356년 호군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얼자(孽子) 석기(釋器)를 받들고 반역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순군(巡軍)에 갇혔는데, 이에 관련되어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었다가 3년 뒤에 살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