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기생제도는 관기로서 궁중의 약방이나 상방(尙房) 등에 소속되어서 약을 달이거나 바느질하는 일을 하다가, 궁중의 연향(宴饗)이 있을 때에는 노래나 춤을 추었다.
국권을 상실한 뒤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기생들이 최초로 모인 조합이 서울의 광교조합(廣橋組合)이었다. 광교조합은 남편이 있는 기생, 즉 유부기(有夫妓)들로 된 조합으로, 뒤에 한성권번(漢城券番)으로 개칭하였다.
기생에게는 본래 시문(詩文)·음곡(音曲)·습자(習字)·가무(歌舞)·예의(禮儀)를 가르쳤는데, 음곡은 가곡(歌曲)과 가사를 가르치고 춤은 정재(呈才)를 가르쳤다. 그 뒤 권번에서는 시조와 경기잡가·서도잡가·민요 등을 추가하여 이습시켰다.
권번은 주식회사 제도로 운영되었는데, 주된 기능은 모든 교육과정을 수료한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것이었다. 그 뒤 계속 권번이 번창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악원학감(正樂院學監) 하규일(河圭一)이 무부기(無夫妓)들을 모집하여 서울 다동에 세운 조선권번(朝鮮券番)이었다.
한성권번과 조선권번에 이어 전성욱(全聖旭)이 서울 낙원동에 종로권번을 설립하여 세 조합이 경쟁하여 서로 명창들을 배출하였다. 그 뒤 세 권번이 병합하여 삼화권번(三和券番)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다.
한편, 지방에서도 권번이 설립되어 기성권번(箕城券番)을 비롯하여 광주(光州)·남원·달성(達城)·경주·개성·함흥 등의 권번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평양에 있던 기성권번이 널리 알려졌다. 권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질 무렵 일제의 강압정책으로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