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계(權啓). 자는 제중(霽仲), 호는 구사(龜沙). 권곤(權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심(權深)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권오(權悟)이며, 어머니는 이국주(李國柱)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생원이 되고, 1606년에 음보(蔭補)로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 이어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를 거쳐 한성부참군이 되었으나,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역도들을 두둔하였다는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
1615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호군 겸 오위장이 제수되고, 이듬해 분병조참의(分兵曹參議), 1617년에 평해군수가 되었으나, 박정길(朴鼎吉)의 사주를 받은 사형수의 무고로 면직되어 충주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때는 상중(喪中)에 있어 참여하지 못했으나,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피란간 왕을 배알하고, 그해 겨울 동지사 겸 성절사에 임명되어 바다를 건너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5년 무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바로 호군으로 서용(敍用)되고, 이듬해 조사(詔使)를 문안하러 평양에 갔으나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충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으나, 이미 강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이 해 파주목사를 거쳐 1635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환도한 뒤 강릉부사가 되었다. 1639년 오위도총부부총관·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구사집』·『구사금강록(龜沙金剛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