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유(子唯). 호는 기계(奇溪). 의성군 점곡면(點谷面) 사촌리(沙村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진사 김양식(金養植),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김곤수(金坤壽)의 딸이다. 뒤에 양정(養楨)에게 입양되었다.
10세 전에 「십구사(十九史)」를 읽었고, 13·4세에 4서 5경을 독파하고, 제자(諸子)와 백가(百家)를 섭렵하여 약관에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향시(鄕試)에 여러 번 합격하고 정시(庭試)를 치루고자 서울로 가는 도중 한강(漢江)에서 풍파를 만나 배가 전복되었으나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침착하였다 한다.
1856년(철종 7) 부사(府使) 신석우(申錫雨)의 초빙으로 낙육재(樂育齋)의 훈장(訓長)이 되어 학생을 가르쳤고, 거처하는 침실을 셋으로 나누어 한곳에는 장서실로 정하여 책을 쌓아두고 항상 책을 가깝게 하였다.
그의 선조(先祖)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사적을 찾아 나라에 보고하여 포상을 받았으며, 선대의 사적을 수습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1865년(고종 2) 예조(禮曺)에서 시행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873년 향교(鄕校)의 교장이 되어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과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도입하여 시행에 힘썼다.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교안이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천자문(千字文)』을 모방하여 「유의(幼儀)」를 만들어 교재로 삼았다. 성리학에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였으며 저서로는 『기계문집(奇溪文集)』 8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