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혁명행동 부주필,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장지락(張志樂), 장명(張明), 이철암(李鐵岩), 한비종, 유종화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5년
사망 연도
1938년
출생지
평안북도 용천
관련 사건
1·29학생운동
정의
일제강점기 혁명행동 부주필,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본명 장지락(張志樂), 별명은 장명(張明)·이철암(李鐵岩)·한비종·유종화. 평안북도 용천 출신.

생애와 활동사항

장로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는 등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입학을 준비할 때 일본 노동자와 재일조선인의 열악한 처지를 목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1920년경 만주로 건너가 6개월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상해(上海)로 간 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교정원 및 인쇄공으로 일하였다. 이때부터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고 손문(孫文)의 글도 접하게 되면서 공산주의를 믿기 시작하였다.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교사로도 재직하였으며, 1925년 7월 국민혁명의 중심지인 광저우[廣州]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6년부터 조선혁명청년연맹의 간부와 기관지 『혁명행동(革命行動)』의 부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외국어·경제학·철학을 공부하다 북벌의 선봉대인 독립단에 참가하였다. 하이루펑당학교[海陸豊黨學校]에서 국제공산주의운동사·노동운동 등도 가르쳤다.

1929년 중국공산당의 요청으로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있으면서 8월의 조선혁명청년연맹 대표대회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주와 화북 지방 한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김산의 좌경방침이 실천되고 있던 1931년에는 장자커우[張家口]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이즈음 김산은 리린산(李林山)노선을 좌경적이라고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당에서 배척을받았다. 그러나 이후 중국공산당은 김산의 비판이 정당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1935년 9월 스자좡[石家莊]에서 일본어숙(日本語塾)을 운영하며 철도노동자를 중심으로 당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곳에서 벌인 대중 사업이 성과를 거두어, 북경(北京)에서 1·29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스자좡에서 4,000여 학생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지도하였다. 이 시위사건으로 1936년 1월 중국공산당스자좡위원회로 정식 인준을 받기에 이르렀다.

1936년 들어 중국공산당이 ‘내전정지’와 ‘일치항일’을 외치자, 상해에서 조선민족 혁명가의 임무를 집필하였으며, 1936년 7월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1938년 8월 산간닝[陝甘寧] 소비에트 지구에서 조선혁명가대표로 당선되어 활동하다, 당의 요청으로 옌안[延安]의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때 미국의 언론인 웨일즈(Wales, N.)를 만나 자신의 생애를 구술하였으며, 웨일즈는 이를 토대로 『아리랑의 노래』(1941)를 출판하였다.

1938년 산간닝변구보안처[陝甘寧邊區保安處]에 의해 반역자, 일본 스파이,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혀 비밀리에 처형을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등소평(鄧小平) 등장 이후 중국공산당중앙조직부에 의해 1983년 1월 복권되었다.

참고문헌

『아리랑』(님웨일즈 저, 조우화 역, 동녘, 1984)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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