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김시언(金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김언묵(金彦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석(金錫)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인갑(金仁甲)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서윤(庶尹) 홍이곤(洪以坤)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 주서(注書)가 되고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했으며, 1610년(광해군 2) 동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향시에 출제한 시제가 왕의 실정(失政)을 비유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 영해(寧海)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정랑·병조정랑·수찬(修撰)·교리(校理)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625년(인조 3) 응교(應敎)가 되어 문학을 겸했고, 이듬해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산릉역(山陵役)에 공로가 많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날 징후가 보이자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의정부의 의논에 따라 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
그러나 왕의 뜻을 어기고 척화를 주장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4년(인조 12) 지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호조판서 겸 동지춘추·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가 9월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강화유수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백리에 뽑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눈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충주로 내려갔다. 1641년(인조 19)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할 때 대제학 이식(李植)과 총재관(總裁官) 홍서봉(洪瑞鳳) 등의 추천으로 다시 판중추부사 겸 춘추관사를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안질로 실록개수(實錄改修)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전적(典籍)과 경사(經史)에 밝았다.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하담집(荷潭集)』·『부계문기(涪溪聞記)』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